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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여성의 조직화 과정과 의의

큐키🍪 2020. 9. 10. 01:12

일제강점기 여성의 조직화 과정과 의의 

– 기독교 여성주의와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목차

 

서론: 일제강점기 여성, 피해자 개인이 아닌 조직화의 노력에 초점을 맞춰야

 

본론

1. 기독교, 교육을 통해 현실적인 차원에서 조직을 형성하다

(1) 기독교, 남녀평등 교육을 주장하다

(2) 조선의 기독교,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다 – 차미리사를 중심으로

(3) 기독교, 가정 내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다
(4) 기독교, 파생조직으로부터 여성주의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다
(5) 기독교 조직의 의의

2. 사회주의, 가정 내 여성을 해방시키다 

(1) 사회주의, 여성의 한계를 가정에서 공동체로 확장시키다

(2) 사회주의,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해체시키다

(3) 사회주의, 여성에게 노동자 정체성을 부여하다

(4) 사회주의 조직의 확장과 의의

 

결론: 개인과 국가 사이, 일제강점기 여성주의 조직의 의의

 

 

서론: 일제강점기 여성, 피해자 개인이 아닌 조직화의 노력에 초점을 맞춰야

 

 이용수 전 정대협 공동대표의 폭로로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비리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더불어 이용수라는 한 개인에 대한 인격적인 비방과 위안부 활동과 관련한 비방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위안부 여성으로서 실제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폄하는 빈번한 일이었다. 그들의 주장을 은폐하고 비하하기 위한 의도적 목적을 담지 않더라도, 운동가들은 ‘할머니’로 명명되거나, 피해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소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해당 명칭은 일제강점기 피해 사실에 대한 감정적 동원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강점이 있으나, 인권운동가 개개인의 전문성을 격하하는 단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위안부 여성뿐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여성들은 당대 유교사회의 영향력 아래에서 아직까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여성의 젠더에 국한된 제한적인 정체성은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호도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시기 여성의 증언과 활동을 적확하게 판단하지 못할뿐더러 피해자, 혹은 종속물의 입장에서 벗어나 여성 본연의 목소리, 위안부를 포함한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모든 여성들의 언어와 실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에 존재했던 여성 조직화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여성들은 조직화를 통해 가정에 종속된 개체적인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여성 개인의 해방뿐만 아니라 그 조직이 표방하는 실천적인 가치가 조선이라는 해체되고 있던 공동체의 새로운 질서와 이념을 의미한다는 데서 국가적인 대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선행 연구는 일제강점기 시기 여성의 조직화 노력을 여성주의로 귀결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다수의 연구들이 조직화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 조직을 통해 이뤄낸 여성주의의 의미를 되짚는다. 본 논문은 조직화 자체에 초점을 맞춰, 조선 말 여성주의를 표방한 조직화 노력이 그 이전의 남성중심적인 구체제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점에 있어서 조선의 정치, 경제, 이념 개혁의 정당화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조직화 노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기독교와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그들의 조직이 형성되는 과정과 필요를 탐구하고 그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기독교 여성조직은 선교사들에 의한 교육단체의 형성에서 시작돼 서구의 남녀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의 실력양성을 통해 가정 안에서 아내, 혹은 어머니로서 지위 상승을 도모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한편, 기독교 여성조직의 지류로 민족주의 노선이 파생돼 국가적 위급상황에서 여성이 가정 밖에서 도모할 수 있는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국가의 위기인 외세의 침략에서, ‘비아’와의 협력, 서구적 문명인 기독교의 수용과 교육체제의 도입을 여성이라는 개인이 개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여성조직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안정적으로 집단 활동을 벌이는 중간매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주의 여성조직은 기독교 여성조직의 기능을 넘어서 여성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는 의의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공유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기독교의 교리보다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계급간의 단결과 투쟁을 외쳤기 때문에 사회주의 여성역시 남성과 여성의 구조적인 차별 문제에 착목해 보다 사회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기독교가 여성의 교육문제에 천착해 실력을 양성하는 것을 도모했다면 사회주의는 직접적인 노동현실에 착목해 여성의 권리 증진을 파업 등의 행위로 표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성에 앞서 노동자 정체성을 공유한 이들은 노동 조직으로서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했다. 

 

 이처럼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각기 다른 전략을 통해 가부장제에서 고착된 2등 시민으로서 여성을 해방시켰다. 본 논문은 남성중심적인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통한 여성연대의 젠더적 의미를 탐구한다. 또한 약자로 흐르는 혐오와 폭력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 조직화되는 방식에서 절대적 국가의 역할에 치우친 파시즘이나, 무의미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개체주의가 아닌 진정한 국가적 평화의 추구가 가능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여성운동가는 사상과 종교 정체성을 점유하며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피상적인 자유가 아닌, 여성 구성원을 포함한 전민족의 자유를 논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정당성 확보의 측면에 있어서 여성의 사회활동은 기존의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구체제를 혁신하고 진정한 평등의 기틀 위에서 한민족의 평화를 추구했다는데 의의가 존재한다. 

 

본론

 

1. 기독교, 교육을 통해 현실적인 차원에서 조직을 형성하다

 

(1) 기독교, 남녀평등 교육을 주장하다

 구한말 조선의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을 근간에 두고,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다. 개화파는 인권사상과 민권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여성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녀의 귀천을 두지 않았다’(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제27호, 1897년 8월 4일)는 성경구절을 기반해 기독교는 가부장제가 강력한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았던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개화파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대한인민도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하고 동등권을 주어 전국이 복음을 누리게 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그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학문으로 교육시키고 동등권을 부여해 서구 열강과 같이 국익을 증가시키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근거를 펼친다.(독립신문 3권 1호, 1989년 1월 4일자) 정리하자면 서재필을 위시한 개화파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여성 역시 교육을 시키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고, 국제관계적 관점에서 조선의 이익을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을 남녀평등의 이유로 삼았다. 

 

 개화파는 기존의 조선사회의 폐단들을 지적하며, 노동에 충실하게 종사하지 않는 양반 남성들을 그 중심에 두고 비판을 이어갔다.(오인환, 2013) 특히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영향을 받은 <독립신문>은 노동을 기존의 유교사회 가치에 선행하는 것으로 두고, 여성 역시 교육을 통해 노동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그리스도인회보는 ‘남녀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할 것’(대한그리스도인회보, 광무 2년 8월 3일, <녀학교론>)과 같이 교육을 통한 방법론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조선 여성 교육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자유교육의 도입을 실천했다. 선교계 학교는 1886년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1909년까지 총 39개교에 이르렀다.(손인수, 1971)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정의여학교 등 대다수의 선교계 학교는 여학교로 가부장제 체제 하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상실한 여성들은 이러한 기독교 학교를 통해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박연호, 손세희, 2011) 정리하자면 기독교는 한국 여성으로 하여금 교육을 통해 남성과의 평등을 이룩하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위해 노동하게끔 만들고자 했다.   

 

(2) 조선의 기독교,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다 – 차미리사를 중심으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교회는 민족교회로 스스로를 정체화 하여(민경배, 1982) 애국충군의 뜻을 다진 바 있다. 즉 당시 일제강점기 기독교 세력은 반일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했고, 이는 기독교계 학교에 재학 중인 여성 기독교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를 조선에 알린 서양의 남녀평등사상이 본질적인 인권보다 부국강병에서 이해된 것처럼 조선의 여성 운동 역시 여성인권의 향상에 대한 의미보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측면으로 이해됐다.(정정숙, 1996) 이런 기독교에 대한 영향으로 초기에는 여성교육에 뜻을 모은 여성단체들이 형성됐다. 순성회, 양규의숙, 여자교육회 등이 이에 해당했다. 

 

 여성 본위의 기독교 교육 조직들은 단순히 여성개체들에게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은 여성운동을 젠더적 의미에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가정, 사회, 최종적으로는 민족에 이르기 까지 사상의 저변을 넓히고 있었다.(천화숙, 1997) 여성교육운동은 당시 활동했던 유력 정치인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차미리사 여사의 덕성여자실업학교였다. 기독교 정체성은 차미리사로 하여금 후견인 여운형과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승동교회에서 만난 여운형과의 인연으로 후에 덕성여자실업학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상가보다 실천가에 가까운 차미리사의 여성운동은 당시 시대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차미리사는 당대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노선과 마찬가지로 ‘현모양처’론을 표방했다. 그는 가정 안에서의 여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근대성 기획의 일환으로 근대적 가족 형성과 그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정립에 몰두했다.(윤지관, 2011) 

 

 즉 차미리사는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여성 교육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보수적인 남성 지식층과도 연대할 수 있는 차원을 마련해두었고, 차미리사의 현실 부합의 실천적 태도는 급진파의 기반미비로 인한 실패보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구식가정 부인들의 개혁에 보탬이 됐다는 평가도 존재한다.(윤지관, 2011) 따라서 차미리사의 활동은 현실에 존재하는 자원을 바탕으로 젠더적 의미에서 매몰되지 않고, 민족주의라는 세력과의 연대를 도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차미리사는 미국에서 ‘한국부인회’를 조직하며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을 함께 참여했다. 그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에 유입된 기독교는 사실상 서구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이에 서구 기독교 영향을 받은 여성들은 여성운동에서 역시 서구의 양식을 받아들였다. 차미리사는 신가정을 제시하며 서구의 가정을 높이 평가했다.(예지숙, 2018) ‘행복한 교외 가정주부’으로서, 가정에서의 일에서 참 기쁨을 누리는 여성의 본분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며(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 2일) 차미리사는 서구 근대의 성별분업 기획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 언론 역시 근화여자실업학교를 높이 평가하며, 가정주부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학교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이 학교는 그저 솜씨 있는 일꾼을 길러내는 것이 교풍입니다. 여기서 이러 한 건실한 살림살이를 배운 아가씨들은 각각 자기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 사회 전반에 흩어집니다.” (「경성 안 여학교 올 졸업생, 근화여실」, H조선일보H (1938.2.15), H차미리사 전집H1, 733쪽.)

 

(3) 기독교, 가정 내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다
  당대 여성을 둘러싼 일반 사회의 요구는 지엄한 것이었다. 서구 기독교 역시 형식은 다르지만 여성을 가정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요구와 맞닿은 점이 있었다. 때문에 조선 기독교 여성들은 어렵지 않게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에 대한 규범에 공감하고 이를 체화할 수 있었다. 김활란 역시, 미국의 ‘모성적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의 임무를 강조하며 여성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공고히 했다.(예지숙, 2018) 이화학당의 당장 로드와일러는 “참된 가정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조력자가 되고 우리 학교의 교사가 되며 기숙학교의 조수가 되고 의료사업의 간호부나 조수가 되게 하려는 데”(The Korean Repositiory, Vol.1, 1892.3, 89-91) 여성교육의 목표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한 기독교 여성들은 사회에 규합하는 여성상 교육을 수행하거나, 가부장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채 여성으로 하여금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공적 어머니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여성들은 기독교 조직 내에서 일차적으로 ‘교육’을 통해 규율되며 그 후 가정으로 배속돼 공동체 내에서 ‘솜씨 좋은’ 일꾼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는 여성관은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양처현모’상을 도입한 일제의 여성교육관과 일치되는 지점이 존재했다. 일본은 가정 내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의 의식 개량을 통해 차세대를 천황 신민으로 양육하고자 했다.(임희숙, 2005) 제국주의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자 애국심 고양 교육을 구현했다. 양처현모론 역시 일제의 애국심 고양 기획의 일부였다. 유교사회의 기본적 윤리 규범인 ‘충’과 ‘효’는 일제의 편의에 의해 그 위계가 재설정됐다. 국가를 위한 ‘충’을 가정을 위한 ‘효’에 앞세우면서, ‘열녀효부’보다 ‘양처현모’가 강조됐다. 실제로 김활란의 경우 1930년대 기독교 민족운동이 쇠퇴되기 시작하자 친일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여성으로서 가정의 남성을 일본을 위한 전쟁에 ‘기꺼이’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국가에 속한 남편이나 아들 또한 내 생명이 국가에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김활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12.) 

 

(4) 기독교, 파생조직으로부터 여성주의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다

 기독교 여성주의가 가정 내의 역할을 강조한 일면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여성주의를 단선적으로 ‘양처현모’ 상에 여성을 합치시키는 관점이라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여성들은 내부적으로 또다시 조직화를 시도했다. 일례로, 평양 숭의 여학교 교사 황에스더는 김경희, 박정석과 함께 1913년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송죽결사대는 단순히 친목단체가 아니라 독립사상을 위해 결집한 단체로 후에 3.1 운동의 준비조직으로 자리 잡았다.(이우정, 1985) 3.1 운동 당시에는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여학생들, 김공순, 박순애, 진신애 등이 참여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3.1운동 참여가 일제탄압을 이겨내고 시위를 지속할 수 있던 원동력이 되었다. 즉 기독교 영향으로 형성된 여성 학교는 여성으로 하여금 애국에의 주체성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실천적인 노력을 하기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 여성 스스로가 가정주부로서의 교육을 수용하고 가정이라는 한계 내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치진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하위 조직들의 실천적 활동을 통해 기독교 여성주의는 상당 부분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하므로 여자도 사람이 된 이상-조선에 생겨난 이상에는 조선사회를 위하여 사람다운 즐김과 빛을 위하여 일하는 마당에는 남자와 함께 일을 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것이요 (중략) 청년사업으로만 할지라도 목하 십삼도 각처에 남자편의 청년회는 거의 없는 곳이 없어서 그 효과도 차차 나는 모양이오나 불행히 여자 편에서는 오직 예배당 안에서 예수교끼리만 모여 조직한 극히 협의의 엡윗 청년회가 몇 곳 있을 뿐이요 모든 사회의 온갖 여자가 함께 모여 조직한 통산청년회가 아직 한 곳도 없고 (중략) 사회를 위해서나 여자 편을 위해서나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올시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2일(3)5)

 

 기독교 여성들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조직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독교의 교리 하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남성과 여성은 모두 ‘사회’를 위하여 의무를 다해야 했고, 이에 공동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청년사업을 예시로 들었다. 위 기사는 당시 조선의 여성단체는 엡윗 청년회라는 기독교 정체성을 띤 조직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여성 조직의 미비를 단지 여성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로 돌리고 있다. 이를 통해 기독교 여성주의가 기독교 정체성을 넘어 사회 전체에 이바지하는 목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룩하려 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조직화의 실천적인 노력은 192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조선YWCA연합회)에서 상징적인 결실을 맺었다. 

 

 조선YWCA연합회는 빠른 시기 내에 30여 개의 지부를 형성하며 전국적인 규모를 가졌다. 지방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여자기독교청년회와 전국적으로 분포한 선교계 여학교가 이 같은 거대 조직 형성에 기틀이 되었다. YWCA는 교회 기반으로 형성된 잠재 조직들을 바탕으로 1923년 서울에서 정식 창설된 이후, 잠재조직들의 추가적인 지부 가입으로 조직적 연계를 이룩할 수 있었다.(천화숙, 1997) YWCA는 성경연구나 기도모임을 통해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기독교 밖으로 확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을 전개했다. 공창폐지운동과 야학강습소를 통해 의식개혁과 문맹퇴치에 힘써 여성인권을 증진시키는 한편, 농촌, 사회, 산업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도서를 출판하고 교육하는 등 범사회적인 민족 개혁운동을 실시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1일) 여성 구성원이 모였기 때문에 단순히 여성의 문제에 골몰한 것이 아니라, YWCA 조직에 모인 여성들은 여성의 문제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아우르고자 했다. 

 

(5) 기독교 조직의 의의

 차미리사를 비롯한 기독교 여성주의의 일각은 종래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며 신가정을 제시했다(예지숙,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가정론은 전통적인 가족중심주의 유교사상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명심보감> 치가 편에 등장하는 ‘자효쌍친락 가화만사성(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사회는 개별 인간의 모임이 단선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로서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서 비롯된 한 가정, 가정이 모인 사회, 그리고 결국엔 나라 전체로 이어지는 구성적 관점을 취했다. 따라서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화목한 가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가정의 일은 곧 사회적인 일로 여겨졌다. 즉 기독교 여성운동은 사회구성의 기본요소가 되는 가정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이 교육을 통해 해방됨으로써 ‘즐거운 가정’으로 개량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논리를 취할 수 있었다. 기존의 유교적 가족이 계보적으로 이어지는 남성을 중심으로 종단형의 가족의 의미, 즉 대를 이어가는 가족과 효에서 충으로, 종단적으로 확장되는 가족 구상을 중시했다면 기독교의 여성주의는 가정을 중시하는 것은 일치하되, 가정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단위인 부부쌍에 대해 더 초점을 맞췄다. 즉 부부라는 횡단적 구성에 집중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위치를 구상했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현모양처라는 일반적인 표현보다 ‘양처현모’, 아내의 위치를 앞에 둔 이름이 더 적절하다는 평가가 등장한 것이다. 

 

“참말 조선 가정은 여러 가지로 개량할 점이 많습니다. (중략) 다만 사랑이 없는 조선 가정, 이해가 없는 조선 가정, 쓸쓸하고 재미없는 가정을 사랑이 많고 이해가 있는 향기롭고 즐거운 가정으로 개량하지 아니함이외다. 그러면 그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중략) 필경 그리하려면 부부 두 사람이 상당한 수양이 있고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동아일보, 1923년 1월 1일(3) 10).

 

 정리하자면, 기독교의 여성운동은 몇 가지 결이 다른 노선들이 파생되었지만 공통적으로는 기독교 교리에 따라 여성의 교육을 증진시키는 데 우선적 목표를 두었다. 이에 사용된 논거로는 전통 유교사회에서도 포착할 수 있는 가정 내 여성의 충실한 역할 수행이 있었다. 나아가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은 유교의 가부장제 체제에서 요구하는 완전 종속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의 여성 교육은 보다 서구적인 의미에서 체계적 교육을 수행하고 가정 공동체보다 확장된 국가 공동체로의 봉사를 요구했다. 기존의 규범에 일정부분 부합하며 세를 확장한 기독교 여성주의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적실성을 가지지만, 이처럼 여성의 역할을 가정이라는 한계에 가두었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현모양처 교육과 여성관은 여성의 가정 밖 사회인식을 저해시켰고, 이에 완전한 남녀평등을 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임희숙, 2005) 또한 혹자는 기독교의 전래나 선교사의 개입을 통해 성장한 기독교 여성주의에 대해 조선민족의 자생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을 강조한 서구의 기독교와 다르게 조선의 기독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민족적 상황에서 다양한 조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했다는 점에서 서구와의 차이점을 보였다. 

 

2. 사회주의, 가정 내 여성을 해방시키다 

 

(1) 사회주의, 여성의 한계를 가정에서 공동체로 확장시키다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 담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가부장제에서 어긋난 신여성 모두를 비판한다는 점에 있어서 결절점을 가졌다. 사회주의 신여성은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조직화를 시도했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질서에서 가정에 종속된 여성들은 본인의 세계를 확장하고, 안티테제로서 자본주의 국가를 상정함으로써 조직화된 정체감을 공유했다. 정칠성은 ‘부르주아의 완구되기를 절망하는 의식 없는 불구자’(신여성이란 무엇인가 - 가치대폭락의 허물은 누구에게, 정칠성, 조선일보, 1926.1.4.)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기존에 신여성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적 여권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는 ‘신여성’이라는 이름을 수여하는 자유주의 여성들의 ‘가정개량론’, ‘현모양처주의’가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압복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이춘수,  신년을 際하여 - 특히 무산부인에게 , 조선일보 1926년 1월 4일) 이처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의 목적은 단순히 젠더적 의미의 여권상승뿐만 아니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가 부르주아를 안티테제로 삼고 이와 규합되지 않는 여성역시 여권해방의 적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성별의 한계를 넘고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를 넘어서 세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조선 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 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進)하여는 전 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 성취할 수 없게 되었다.” (김준엽, 김창순, 1973)

 

“지금의 세상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정치적 위기, 그 반면에 발흥하는 근로 계급 운동의 첨예와 치열화, 바야흐로 다사다난해지며 차차 어렵고 바쁜 시절이 닥쳐옵니다. 이러한 시절에 미미하지만 올바른 의미로서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이니, 제1선에 나서서 총부리를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음으로 양으로 후위(後衛)로서 성의 있는 노력을 보여 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진정한 시기의 파악과 동향의 관찰과 역량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론과 전술을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주방의 어멈이 되고 충실한 ‘암탉’으로만 시종(始終)해서야 어느 겨를에 많은 공부를 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견지에서 부녀 계급은 무엇보다도 〈일부 내용 삭제〉 주방의 질박화(가난한 주방이라고 질박화가 없을 리 없습니다)와 생활의 단순화(가난한 생활이기 때문에 더욱 단순화가 필요할 것입니다)를 도모하여, 많은 시간과 힘을 주로 공부에 기울여서 역량의 준비에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 (혁명은 부엌으로부터, 이경원)

 

 가정이라는 남성 본위의 조직을 탈피하는 것은 여성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배경이 확장됨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여성은 ‘암탉’으로서 남성의 삶을 보완해주는 역할에 머무른다. 이와 같이 여성의 역할을 규정하고, 이를 성별적인 특질에 적합한 것으로 치부하는 판단은 루소의 <에밀>에서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관점과 일치되는 지점이 있다.

 

“참으로 아기에게 젖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어머니인 것처럼 정녕 스승이 되어야 할 사람은 아버지이다.” 

 

 유교사회와 루소는 공통적으로 ‘마땅히 그런 바로서’ 자연적인 여성의 성질을 성 역할 고착화에 이용했다. 또한 여성과 남성의 태생적인 기능의 차이를 유지하고, 이를 발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공동체에 옳다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인 공동체의 불구화를 의미한다. 루소에 대해 울스턴크래프트가 비판한 지점과 같이, 가정에의 여성종속은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계약의 당사자를 남성만으로 한정 짓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회에서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여성의 시민권만이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이루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구성원으로서의 여성 역시 사회가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장제의 종속은 구성원의 기능을 상실하는 사회와, 또 참여권을 상실하는 개인의 상호적인 결손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2) 사회주의,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해체시키다

 사회주의 여성으로서, 이경원은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기능을 의도적으로 해체했다. ‘질박한 주방과 단순한 생활’은 여성에게 잉여시간을 허락하고, 여성은 잉여시간동안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가사에 대해 독박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남녀차별을 완전히 소멸하는 방향은 아니나, 가사를 최소화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여성은 근로 계급운동으로의 참여를 이룩하고자 했다. 이런 일련의 주장을 통해 사회주의가 여성의 정체성을 ‘어머니’에서 계급 운동가로 확장시킴이 드러난다. 확장된 여성 정체성은 여성이 자아실현의 자유를 실천하는데 돕고, 또한 공동체의 문제를 해소하는데 여성 구성원의 참여를 허락한다. 가정 공동체의 여성 자아가 단순히 가정을 완전하게 만드는데 사용된다면 사회주의 공동체 속 여성은 자본주의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한 근로 계급 운동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가사 주도권을 여성이 쥘 수 있는 상태와, 사회에 동원되는 것은 남자뿐이라는 사실은 결코 동등한 의미가 아니다. 이는 가정이 사회에 포함되는 조직임을 가리는 술책에 불과하다. 하위 조직에 여성을 묶음으로써 상위 조직을 지배하는 남성과의 젠더 간 격차는 체계적으로 고착화된다. 가부장제에서 여성과 남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로서의 사회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때문에 여성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가사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된다.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내로서 존중받는다는 사실은 결코 그가 인간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에서 존재하고, 여성은 가정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구성원 절반의 역할을 부정당하는 세계다. 때문에 사회주의 여성은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들과도 차이를 뒀다. 

 

 “요사이 종로 네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행 화장, 유행 의복을 내세우며 다투어 경쟁하는 신여성분들, 이 중에는 예수님 덕분으로 멀리 미국에서 유학한 분도 계시고, 훌륭한 학교를 마치고 부자이면 첩도 좋다는 분도 있으며, 자본주의 말기의 대표적 표현인 카페와 여러 신여성들, 이들 신여성들은 신년의 새로운 신호에 대해서 거울을 보며 정짜옥(丁字屋), 삼월(三越)을 연상하여 가면서 연구 중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 바 신년에 신호를 울리며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울릴 진정한 신여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 공장 등 흑탄 굴뚝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앞날을 바라보는 부인 노동자, 정칠성)

 

(3) 사회주의, 여성에게 노동자 정체성을 부여하다

 여성의 이름 아래에서 조직되는 것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여성은 기존에 여성의 이름으로 가려졌던 female body의 새로운 정체성을 조직했다. 당시 새로운 용어인 ‘신여성’을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서 해석되는 여성의 수동적 역할에서 노동자의 이름 아래에서 활동하는 여성을 호명함으로써 용어의 전치를 시도했다. 이처럼 사회주의 활동은 당시 여성들에게 개개인 별로 새로운 정체성을 향유할 자유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의 재정의를 통해 여성들 스스로 주체적인 조직화를 시도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은 단순히 남성과의 갈등 상황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의무 수행과 연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노동자로서의 여성은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부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 

 

“부인(婦人)의 해방은 결국 경제적 독립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조직 아래에서 경제적 독립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것은 남자 노동자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인해방운동은 무산계급운동과 같이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조직을 사회주의 경제조직으로 변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黃信德,「朝鮮婦人運動의 過去 現在及將來」,『朝鮮及朝鮮問題』제1집(1927), p.175.)”

 

 경제적 자립은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표방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반일 애국논리로 풀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는 사상적 차원에서 조선 여성을 설득하는 논리적 정당성을 갖췄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사회주의로의 요구는 당대 여성이 처해있는 노동환경에 의해 요구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 노동계급 여성이 주체가 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경제적 착취가 이어지던 일제강점기 시대에 여성에게 일종의 현실적인 대안이 됐다. 일제의 노동 착취 하에서 스스로를 노동자로 정체화한 여성들은 실질적인 파업과 쟁의로 연대를 보여줬다. 

 

“(황해도 옹진군 암기농장의) 여공의 생활은 실로 참담하답니다. …임금은 불과 이십전 내지 사십전임니다. … 아츰에 출근이 좀 느지면 오전씩 벌금을 밧고 y심 시간에 좀 느지면 십전, 코를 한번 잘못 풀어도 오전 내지 십전, 너무 곤하야 잠간 조는데는 으레히 십오전씩 … 어떠한 때에는 임금보다 벌금이 만케되여 … 더 심하면 구타까지도 능사로 하여 온다 함니다.” (동아일보 1927.10.21.) 

 

 경공업 중심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1920, 30년대는 상대적으로 값이 싼 여성 노동력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1922년 9870명에 불과했던 여성 노동자 수는 1936년 50500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남성의 증가폭 (38173명 -> 98241명)보다 훨씬 급격한 변화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의 삶은 경제활동을 통해 나아진 것이 아니라, 가정보다 더한 착취의 굴레로 들어갔다. 

 

<표1> 면방직 32개 공장 노동자 구성 (1937년) (단위: 명)

 

16세 미만

16세 이상

남자

138

2090

2228

여자

2976

7114

10090

3114

9204

12318

 

자료: <<식은조사월보>> 제45호 (1942) p.17.

 

<표2> 조선인 직공의 교육정도 1993 [단위:%, (명 수)]

교육정도

방직공장

기타공장

교육정도남자

여자

남자

여자

무학자

10.3

60.6

54.1

11.1

64.5

28.9

보통교육(1)

36.7

23.8

26.0

28.6

27.3

28.2

보통교육(2)

31.9

13.9

16.0

30.5

7.9

23.0

중등교육

21.1

1.6

2.9

29.8

0.3

19.9

100.0(712)

100.0(5327)

100.0(6039)

100.0(4000)

100.0(1997)

100.0(5997)

 

자료: 조선상공회의소, <<조선인직공에 관한 고찰>> (1936) p.27.

비고: 1) 100인 이상의 공장을 대상으로 한 조사, 2) 방직공장은 15개 공장이고, 이를 제외한 기타 공장은 각 업종별 18개 공장의 합계,  3) 교육정도의 구분: 보통교육(1); 보통교육을 수료하지 못했거나 그에 준하는 자, 보통교육(2); 보통교육을 수료했거나 동등정도의 학력을 가진 자

(*<표1>, <표2> 모두 강이수, <1930년대 여성노동자의 실태 –면방직업을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위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 유년공의 비율은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경공업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교육수준은 남성의 교육수준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종합하자면 여성은 일제강점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노동 현장에 내몰린 셈이다. 임금 수준 역시 열악해,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 조선 방직여공은 하루 평균 12시간을 일하고 40전대의 공임을 받았다. 이는 당시 일본 방직여공의 평균 임금의 절반에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식은조사월보 제45호, p.18.) 더불어 조선방직에 취업했던 여성의 증언은 척박한 노동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부모님들은 ‘공장에 가면 여자 다 버린다’는 소문이 있어 반대했다. (중략) 공장에서 일하는 첫날 너무 힘들어 모집해 온 많은 여공이 울며불며 보내달라고 사정하였으나 절대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강이수, 1993) 이와 같이 척박한 노동환경에 처해있는 당대 여성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주창하는 사회주의의 확산은 사실상 필연적인 것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 시기 노동쟁의를 주도하며 실질적인 의미의 투쟁을 전개했다. 1923년 7월 경성 고무공장 파업을 필두로 방직, 제분 등의 부문에서 여성노동자에 의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기존에 가정에서 착취되는 구조가 노동환경에서 재생산되자 이에 대해 노동자 정체성으로 연대해 대응한 것이다. 

 

(4) 사회주의 조직의 확장과 의의

 사회주의는 여성이 가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정체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노동환경에서 비롯한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는 현모양처론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 주장했고, 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들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장인모, 2008) 이보다 앞서 무산자동맹회나 북풍회, 혁청단은 강령과 결의를 통해 ‘여성문제’를 사회적 과제로 인식했음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주축이 되어 조직을 구성한 것은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가 시작이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활동을 벌였다. 주세죽, 정칠성은 인천노동총동맹회 상무위원으로서 조합 내 하부 조직으로 설치된 여성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경일, 1992)  

 

 사회주의 여성들은 단지 조선여성동우회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내부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했다. 분파에 따라 나뉜 여성운동 단체들은, 구여성을 위한 교육으로 여성해방에 있어 신여성과 구여성을 망라하는 ‘여성해방동맹’, 부인해방을 모토로 토론회를 중심에 둔 ‘경성여자청년회’,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실질적으로 담당할 무산계급 여자청년에 대한 훈련을 목표로 한 ‘경성여자청년동맹’등이 있었다. 이처럼 각자의 이해관계와 목표하는 바를 세분화하고, 이를 달성하고자 분파된 사회주의 여성조직은 중앙에 조선여성동우회를 두고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벌이며 단체의 유기성을 유지했다. (裵成龍, 1929.2.10 <朝鮮社會運動小史>(十四) ≪조≫) 사회주의 세력 내에선 이처럼 크고 작은 차이점이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여성 억압의 근원을 사적소유로 설정함으로써 공유된 사상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기존의 민족주의계열 여성 운동은 철저하게 타자로 취급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이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반대하지 않는 여권운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는 ‘현모양처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신여성론은 ‘부르주아의 인형이 되고자 하는 자유’를 부르짖을 뿐이며,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여성 교육은 ‘무지한 기계를 영리한 기계로 발달시켜 이용에 편리를 도모한 것에 다름 아니다’고 지적했다. (李春壽, 1926.1.4 <新年을 際하여-特히 無産婦人에게-> ≪조≫) 이처럼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민족주의계열 여성운동은 합치될 수 없는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긴장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여권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역시 이를 파악하고, 민족주의계열 여성운동과 협동하여 근우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여성운동의 조직화 역사에서 단순히 국가주의, 사상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의미에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조건 역시 고려됐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서 급선무로 꼽힌 문제는 전통적 인습과 봉건적 관습을 극복하는 문제였고, 이는 특히 여성의 경우에 더욱 절박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약자로 흐르는 착취구조는 식민지 시기 내내 여성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최하층에 자리 잡은 여성은 구조적으로 누적되는 억압과 통제를 겪어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는 여성을 둘러싼 이중적 억압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여성은 먼저 전통 유교사회에서 가정 내의 폭력과 착취를 겪을 뿐만 아니라, 교육 미비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에 강제 진출돼 또 다른 형식의 폭력을 당해야 했다. 사회주의는 이 두 가지 억압 모두를 함께 비판하고, 사회구조 차원의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건설로의 길이 사회 전반 개혁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여성들은 이를 위한 실천적인 노력으로 세력 내의 조직 건설과 분화를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결론: 개인과 국가 사이, 일제강점기 여성주의 조직의 의의

 

 선행 연구는 대체로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들의 일대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2019년에는 여성운동가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연구들은 남성독립운동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별 주목을 덜 받고 있던 여성운동가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존재를 부각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개별인물에 대한 탐구는 한 개인의 전기에 불과하다. 여성들은 조직적인 행동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했고, 가부장제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름으로 활동했다. 유교사회의 여성으로서 개인은 가부장 남성의 소유물로 귀속되기 쉬웠다. 그러나 여성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은 가부장제의 종속을 벗어나, 주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교 사회에서 행위자는 일상적으로 남성 기본 값을 전제한다. 문화적 코드로 주입된 가부장제는 사회를 가부장 남성을 기준으로 형성한다. 조선 역시 강력한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남성 개별 행위자를 상정한 뒤 구조적 차원에서 여성 행위자를 배제했다. 여성 개개인은 가정으로 귀속돼 한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때문에 각각의 여성은 가정 문제에 매몰돼 각자의 ‘여성’으로서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 사회에서 여성은 스스로 여성임을 인지하는, 젠더 인식에 앞서 계속해서 충실히 가부장을 보좌할 것 이라는 강제 하에 사적영역에 갇히게 되었다. 이 같은 자기인식 부족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적 존재로의 가능성을 사적 존재로 한정지음으로써 공적 영향력을 지우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때문에 여성은 유교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주요 정치 행위자가 될 수 없었다. 

 

 기독교 여성주의 역시 가정 내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으나, 이는 유교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가부장 기획과는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 여성주의는 ‘자연히 그러함’의 차원에서 벗어나 여성을 공적 존재로 호명했다. 기독교는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만의 조직을 만들고, 학습을 통해 사회적 의식을 각성하고, 그 결과 여성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의미 있는 개인이 되기 위해 가정에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부역하라는 강제나 명령이 아니었다.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로 모인 여성들은 그동안 가부장 조직에서 벗어나 여성만의 커뮤니티로 조직될 수 있었고, 이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여성이 아닌 오롯이 여성만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인식은 단순히 남성으로의 시각에서 비롯한 자신의 역할 부여가 아닌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이끌게 됐다. 따라서 여성은 기독교가 제공한 교육의 장에서 자체적으로 여성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교육 방침에 따라 가정주부로서의 기능을 익힘과 더불어 시위 등 공동체에 필요한 일이라면 가정에서의 탈피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한 명의 인민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커뮤니티의 형성, 조직화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바꾼다는 측면에서 몹시 중요한 절차다. 가부장제 커뮤니티가 여성을 둘러싸고 한 여성을 규율했기 때문에, 그 세계를 혁파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한 개인이 아닌 확장된 의미의 조직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더 나아가 사상 자체에서 여성과 남성의 ‘기능’적인 측면을 동등선상에 두어 여성의 선택권을 확장시켰다. 황신덕은 “여자가 조선인으로서 남자와 동일 선상에 서서 활약하기에는 아직까지도 일반적으로 보아 여자 자체의 훈련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회적 조건은 어떠한 시기까지 여자만으로서의 단결을 요구한다”(黃信德, 1928.1.1 <一九二七年 女性運動의 回顧>(1) ≪조≫)는 말을 통해 과도기적 단계에서 여성만의 커뮤니티가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 단독자가 바로 사회에 나아가 남성과의 평등을 이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여성만의 조직을 통해 여성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여성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회주의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형성, 그리고 노동계급이 반혁명 요소를 진압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과 닮아있다. 사회주의가 강조한 바와 같이, 구조적으로 억압받는 계급은 계급 내 구성원들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남녀 관계로 치환하면, 여성 역시 구조적으로 착취되는 현상을 인지하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여성 조직 구성이 선행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 내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은, 견고한 가부장제 현실에 의해 현실적인 부침을 겪었지만, 조직화를 통하여 실천적인 노력을 이어나갔다.

 

 여성주의는 거대한 국가적 변환이나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발달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개인을 잇는 중간 조직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는 가능했다. 국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위협을 마주하게 되고,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겨 개인의 부채감만을 증가시키거나,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둘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중간 조직의 존재는 사회변화를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도모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더불어, 현실에 존재하는 조직은 조직이 표방하는 사상의 실천적 형태로 조직 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특정 사상을 국가 전체에 적용함에 앞서 실험적으로 그 적실성을 탐구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여성주의 역시 조직을 통해 여성주의와 민족주의간의 긴장을 해소하는 담론을 형성해낸 바 있다. 또한 중간조직의 존재는 힘없는 개인이 국가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다. 조선이라는 유교 공동체에서 가정에 봉사하는 제한적 역할만 부여받은 여성들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통해 직접 노동쟁의를 벌일 수 있었다. 이처럼 조직화는 일제강점기 여성에게 여성의 제한적인 정체성을 넘어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조직을 통한 여성의 사회에 대한 자기투사는 국가에 대한 봉사를 가능케 만들었고, 이에 조직화는 여성 개인의 인간적인 자아실현과 더불어 국가의 안녕에 참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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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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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김창순, 『韓國共産主義運動史』,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4~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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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학기에 썼는데... 참 아쉬운 글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욕심을 부리다 말아서, 완벽해지지 못 했다.

이 주제에 대해선 애정이 많이 갔는데, 앞선 연구자분들의 발끝만큼도 못 미친 느낌?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병렬 배치는 마음에 드는데, 역시 하나의 노드는 더 있어야 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