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읽기

<케빈에 대하여> 리뷰

큐키🍪 2021. 6. 21. 12:16

케빈에 대하여

(1)

케빈은 왜 그랬을까?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에바의 질문은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묻고 있다.
케빈은 대체 왜 에바를 괴롭히고, 아빠와 동생을 죽이고, 대량 학살을 벌이고, 엄마의 세계를 망가뜨렸을까?

답은 간단하다.
케빈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가 원하는대로 굴어준 것뿐이다.
엄마가 그걸 원했으니까.

이전에 그런 밈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가 널 이유없이 싫어하면, 그 이유 하나 만들어주라고.

 

 


나도 처음에 이 짤을 보고 타당하다 생각했는데, 다시 또 생각해보면 뭐하러 에너지 낭비를 하나… 싶다.
왜 내가 그이에게 부러 이유까지 만들어줘야 하냔 말이다. 그를 왜 정당화시키냔 말이냐.
거기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란 말, 다들 알고 있을 거다.
증오도 엄청난 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 동력이 다른 말로 또 사랑이다.
웬만해선 꽉 땅에 발 붙이고 안 움직이려는 게으른 사람들을 둥글게 깎아서, 움직이게 하는 바퀴(ㅇ)를 다는 게 바로 사랑 아닌가?

 

“사람을 움직이는 건 결국 사랑이에요” - 고정순

 

우린 사랑해서 움직이는 거다.
특히 증오처럼 열렬한 감정을 품는다는 건,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관성을 깨뜨리는 건 우리의 육중한 몸뚱아리를 굴릴 수 있을만큼 사랑의 힘이 필요하다.

케빈은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엄마가 케빈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원하니까, 사랑받지 못할만한 사람이 되어준 것이다.

케빈은 자꾸 엄마를 변호하고 설명한다.
엄마가 날 던진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떨어진 거예요.
엄마는 노력했지만 그냥 난, 아무 이유 없이(there is no point, that’s the point) 이상한 짓을 하고 엄마를 괴롭히는 거예요.
엄마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익숙해진 거예요.

엄마가 먼저 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영화를 열심히 본 사람들은 에바가 먼저 케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학대했다고 말한다. 그게 케빈의 행동에 대한 이유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케빈은 단 한번도 자신의 행동에 엄마를 방패막이 세우지 않는다.

(2)

‘엄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된거라고!’



웬만한 영화였다면 진즉에 내뱉었을 이 말을, 케빈은 절대 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처럼 그려지는 케빈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핑계를 대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케빈은, 자꾸만 합리화를 시도하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납득되지 않는 행동들만 한다. 사람들은 자기 변호를 시도하며 사랑을 갈구하는데, 케빈의 사랑은 너무 커다래서 엄마를 변호하는 데 그 힘을 소진해버린다.

케빈의 행동은 삐뚤어진 사랑도 아니고 투정도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변호해주는 건 어찌보면 거의 아가페에 가깝다. 에바의 죄를 짊어진 케빈은 결국 에바의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데 성공한다.

에바는 이미 짜증이 나있었고, 케빈은 그의 바람대로 행동해 그의 짜증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싫어할만한 놈을 싫어하는 거, 그게 사람한텐 얼마나 큰 쾌감을 주는 지 모른다. 내가 맞았다는 결론은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완전 신나지 않나.
(내 인생의 숙적이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생각해보라)

에바가 계속 케빈에 의해서 부침을 느꼈다면 그건 에바와 케빈의 관계를 넘어서, 사회적인 합의마저 충실히 따르려 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니깐’ 엄마니깐 아들을 사랑해야지… 하는 압박이 그를 괴롭힌 거지, 만약 그런 사회적 규제가 없었다면 에바는 언제든지 스페인 토마토 축제로 투신할 수도 있었을 거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형태로, 캔에 담겨있는 토마토는 에바와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에바는 토마토를 이전처럼 감각할 수 없다. 정상가족의 울타리에 들어온 순간, 에바는 자기 자유를 일정부분 포기한다. 자기 감각을 잃는다.

 


싫은 놈은 피하면 그만인데.
아들으로서의 케빈은 그 진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다.
어떻게든 그를 사랑해야 한다.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비극은 케빈이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케빈이 에바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케빈을 사랑하라고 시키는 세계로 인해 발생한다.

케빈은 늘 엄마에게 도망갈 여지를 주었다. ‘나는 정말 못된 놈이니까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해요’라고.

아빠한텐 부러 잘 보이는 것도, 엄마를 더 빡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엄마에게 보여주기식 기만이다. 만약 철저히 에바만 미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면, 사회 생활도 잘하고 보란듯이 애인도 데려오고… 그러면 된다. 그러는 중에 에바만 미친 놈이 되면 된다.

그런데 케빈의 가정 외 서사는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오로지 가정 내 케빈을 조망하면서, 영화는 가정 외의 삶과 가정 내의 삶에서 역할갈등을 빚는 에바와는 다르게 케빈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좁힌다. 영화는 분명 케빈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밝히지만, 막상 케빈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가 느끼는 엄마, 그의 사회생활… 그런 건 철저히 에바의 시선에서 빗겨난다.

(3)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는, 너무나 당연히 에바의 세계만을 나열하면서 관객에게 정해진 답을 주지 않는다. 케빈에 대해 영화가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얘기해야 하니까.

주석을 달 수 있는 글은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주석이 붙을 구석이 생기는 거다. 에바의 시선에서 케빈은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다. 나는 케빈을 더 보고 싶은데, 영화는 케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케빈은 오로지 에바의 시선 끝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보는 건 결국 에바와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케빈이다. 그래서 언뜻 케빈의 감정이 등장할 때, 그러니까 케빈의 시선에서 비춰지는 에바가 등장할 때,

‘엄마는 가끔 말을 심하게 해요, 엄마는 날 좋아하지 않아요, 그저 익숙해진 거지’

우리는 더더욱 케빈의 시선에 집중하게 되고, 이게 영화를 논쟁적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케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 ‘에바’다.
우리는 결코 케빈을 볼 수 없다.

이건 우리의 실책이 아니다. 영화의 비완결성때문도 아니고.
애초에 에바가 없는 케빈이 존재하지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터가 이 영화의 시점을 적확히 설명하고 있다. 케빈을 앞세우지만 정작 초점은 에바한테 맞춰져있고, 케빈은 또렷한 상이 아니라 에바의 시선 끝에서 흐릿할뿐이다)

영화는 모성애에 대해 다루는 듯 하지만, 실상 여기엔 엄마와 아들이 아니라 미성숙한 인간 둘이 나와서 그들의 결함을 어떻게든 끼워맞춰보려고 하지만, 자꾸 실패하는 두 톱니바퀴가 그려진다.

영화는 건조하고, 녹이 슨 톱니바퀴들이 쇳소리를 내는 듯한 불쾌감을 텐션으로 치환한다.
이 기묘한 추리극의 범인은 이미 예상했다시피 ‘케빈’이지만, 영화는 표면에 들어난 사실이 아니라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또다른 중첩 서사를 감지하게 만든다.

초반과 끄트머리에 에바와 케빈이 겹쳐지는 씬이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는 케빈과 에바가 닮아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한번 더 나아가면 닮아있다 말할 ‘두’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케빈의 자기완결적 자아는 없고, 오로지 에바의 아들로서 케빈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케빈은 에바의 아들로서만 존재하고, 또 에바의 부속품으로서만 존재한다. 에바라는 본체를 자꾸 갉아먹는 부속품이다.

(4)

케빈의 행동은 에바에 대한 변호임과 동시에, 자기 방어 기제다.
케빈은 에바의 증오를 정당화해주는 한편,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주술을 거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누가 널 이유없이 싫어하면 그 이유 하나 만들어주라…’는 건 사실 자기가 상처받기 싫어서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유없는 혐오는 사람을 재기불능 상태로 짓밟는다. 애당초 고칠 수가 없는데, 뭘 고쳐서 너에게 사랑받는단 말이야? 의지부정(안)이 아니라 능력부정(못)이니까. 나는 영원히 너한테서 미움받아야 한단 말이야? 탈출구 없는 상황은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든다. 누가 날 이유없이 싫어하면, 우리는 이유없는 증오에 자꾸 이유를 찾아서 그게, 정말 내 자신, 내 본체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다. ‘나’에 대한 부정은 그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나의’ 결점은 싫을 수 있지만, 나는, 나만큼은 싫어하지 말아줘.
이게 인간의 생존본능이니까.

그래서 케빈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본체인 에바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우리 너무 남을 싫어하지 말자. 그의 결함과 그의 부도덕함을 싫어할지라도, 그 자신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주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