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읽기

<헤어질 결심> 리뷰; 너네가 시발 사랑을 알아?

큐키🍪 2022. 7. 20. 22:38

나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사랑은 상태일까 행동일까 대상일까? ‘내 사랑아~’ 하면 대상이 되고, ‘널 사랑해’하면 행동인 것 같고. ‘사랑하고 있어’, 라고 하면 상태일 것도 같고. 이렇게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려운 말에 주석을 다는 게 바로 멜로 영화다.

멜로영화는 감독이 나름대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인의 답을 내놓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의 답은 ‘나와 다른 당신을 위해 내 심장을 내어줄게요’ 일 것이다.

<헤어질 결심>의 1부는 기도수 살인사건과 질곡동 사건으로 배치된다.
미리 말하건대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수사 100%, 멜로 100%로 채웠다고 하지만 나는 여기에 무슨 수사극의 서스펜스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까놓고 말해서 님들도 다 대충 예상가는 스토리라인 아니었나? 멜로도 그렇지만 수사도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인데 여기에 연출의 천재성이 돋보일만한 구석은 없었다. 가장 긴장감이 팽팽했던 부분은 그나마 호미산에서 서래가 해준의 등 뒤로 다가가는 장면일텐데 그것도 수사극의 큰 흐름에선 빗겨난 파트아니었나.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미 할만한 건 다했다. 또 코난 조기교육 세대로서 이 영화의 추리는 도무지 도파민을 일으키지 않는다. 현대 수사극은 <나이브스 아웃>이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한다.

산오와 해준의 옥상대치 씬이 한국 느와르 영화가 가야할 길이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다시 돌아오자면, 질곡동 사건의 사랑은 영화를 함축해놓은 극소품이다. 산오가 죽을 때 정말 재치있고 아름다운 연출이 기가 막히다. 영화의 연출적 아름다움 역시 이 하나의 시퀀스로 설명이 된다. 시체를 옆에 두고 짜증이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산오, 산오의 뒤를 쫓으며 건물을 뛰어넘는 해준, 마침내 자기의 사랑을 증명해내는 산오. 남일처럼 뉴스 한 꼭지로 화면전환. 참 기만적이지만 끔찍한 살인이 이 하나의 시퀀스에서 아주 작은 일이 되어버린다. 마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키 추격씬처럼 몇 사람의 생이 걸려있는 문제가 대단치 않게 미니어쳐로 그려진다. 이게 아름다우면 안 되는건데, 사랑이라는 거대한 가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작은 인간들은 아름답다. (<브로커>는 그냥 아름답지도 않고 기만적으로 작은데...)

&amp;lt;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amp;gt; 브레히트적 표현, 어차피 다 영화니까 힘 좀 빼고 봐! 그러다 승모근 커져!

산오가 사랑 때문에 죽는데, 그 애달픈 장면을 해준은 그저 지켜본다. 어찌보면 여기서 우리는 눈치를 챘어야 한다. 해준은 절대, 사랑 때문에 ‘자기’를 내던질 사람이 아니다. 그가 버릴 수 있는 건 그의 심장과도 같은 직업의식이다. (그것도 큰가? 어쨌든 목숨은 아니잖아)하지만 서래는 해준과 다르게 이미 알고 있었다, 홍산오가 ‘죽을만큼 사랑한 여자’였을 거라고 추리하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건, 우리 스스로의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안다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을 얼마나 아느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서래는 사랑이 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서래는 그처럼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살인이 흡연같은 거처럼, 사랑도 흡연 같아서 아는 맛인데 남이 하는 거 보면 더 하고 싶어지지 않나.

이 영화를 정말 치밀하게 아름답게 만드는 감각은 ‘소리’다. 이미 많은 인터뷰에서 말했다시피 둘 간의 언어 차이는 극을 이끄는 원동력인데, 이것을 번역앱으로 청각화시키는 과정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진짜 찔끔했다고. 현실에선 그럴 리 없지만 화자가 두 번 세 번 말하지 않아도 seamless하게 번역으로 이어지는 고풍스러운 성우의 목소리는 영화의 고전미를 살린다. 번역앱은 되게 촌스러워질 수도 있고, 뻔하고 오글거릴 수도 있는 대사들을 아예 제3의 언어로 만들어버린다. 완전히 극화되어 연극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거기서 우리 말이 새 언어로 변장해서 나오는데, 거기다 대고 감놔라 배놔라 할 수가 없는거다.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그 언어체계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진짜 이방인은 서래가 아니라 바로 우리다. 사대주의에 빠지게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말들아... 이 연출을 위해 부러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그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번역앱을 통한 대화는 응당 제 자리를 찾아간다.

해준이 수완에게 쉽게 설명하라고 주문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 언어는 권력이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베풀 수 있는 능력. 영화에서 해준은 늘 서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베풀 수 있는 사람은 해준이다. 설명도 용서도 은폐도 구원도 해준이 서래한테 해줄 수 있다. 서래 역시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지만 그건 사실 의심을 피하기 위한 행동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중에 해준은 화가 난다. 어떻게 감히 거짓말을...! 그런 말간 얼굴을 하고...! 왜 우리는 외국인들을 보며 귀여워하나. 애초에 귀엽다는건 자기 손아귀에 있을 때야 완전해지는 말 아닌가. 언어는 권력이라, 세가 모인데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서래는 믿을만한 남자(나아가 사람)이 없고, 해준은 최연소 경감딱지 단 능력있는 남자, 바람직한 가장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서래가 해준을 사랑한 이유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들을 모아보면 믿음직하기 때문에, 가 가장 큰 이유겠지?

근데 건방지게 해준은 ‘왜 자기를 좋아하냐?’는 질문 대신에 ‘내가 왜 당신 좋아하는지 아냐?’는 질문을 던진다. 서래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질문이 더 중요하지 않나 보통은? 자기 감정에 대한 해석을 스스로 내놓는 거 참 멋없다.

해준은 딱히 서래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알아가지 않는다. 형사로서 용의자에 대한 심문을 이어가는 거지, 또 당장에 반해버린 눈 앞의 여자가 자기 사랑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끼워맞추는 거지, 진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고찰하지 않는다. 해준은 서래가 ‘꼿꼿한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는데 적어도 1부 내내 서래는 거짓말쟁이고, 살인자다. 해준은 직업의식을 지키는 게 품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간병인으로서 프로정신을 가지고 있는 서래에게 더 호감이 갔다는 해석이 많지만... 아 우리 좀 솔직해지면 안 돼요? 처음부터 예뻐서 좋아한 거잖아. 그게 속물적이든 뭐든 솔직한 게 더 꼿꼿한 거 아니냐고. 첫만남 씬에서 박해일 배우가 애드립으로 15초 텀을 뒀다고 하는데, 여긴 감독보다도 배우가 더 정확한 해석을 내놓은 거 같다. 애초에 그는 표면적으로 잃은 게 없다. 제 마음의 죄책감과 품위지, 어차피 안온한 가정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나는 자꾸만 제 심장을 전부 내어놓지 않은 해준에게 툴툴거리게 된다.

나는 산 위에 성이 놓인 것처럼 보여

한치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처럼, 파란색인지 초록색인지 모르겠는 드레스처럼, 바다인지 산인지 모를 벽지처럼. 해준에게 서래는 늘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마음 놓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니 억지로 흐린 눈 했다면, 2부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를 붕괴시킨 사람이니깐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마음 편하자고 서래는 아예 모를 사람으로 정해버린다. 왜 물어보질 않아? 사랑한다며 그 사람 말을 들어보질 않아? 형사가 이렇게 사람을 속단해도 되나. 서래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질문할 때 반성의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질문하고, 답하고. 거짓말이 섞여 있어도 그 사람의 대답을 믿어보고, 아니면 반박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싶어서 그렇게 믿어버리는 쉬운 방법 끝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서로 다름’만 있다. 그때 할 수 있는 거라곤 단 하나, '우리'포함 아무도 못 찾게 사랑을 던져버리는 거다. 깊은 바다에.

하지만 나도 안다... 사람을 속속들이 알아버리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예전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 적당한 일루젼과 기만이 우리에게 사랑이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여긴 어딜까?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 로케이션, &amp;lt;브로커&amp;gt;와는 차원이 다른 장소 이해도

좋았던 장면들도 익스트림 클로즈아웃 장면들이었다. 압권은 마지막 시퀀스의 초입, 서래와 해준의 바닷가 추격씬. (의외로 추리물에서 나올만한 건 다 나오는 영화다) 마지막 차가 주차되는 장면에서 모래와 도로, 바다가 지층처럼 쌓여있는 모습은 사진 기초반 수업에서 훌륭한 직선 이용 방식의 모범사례로 나올법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카메라는 저 멀리서 사람들을 작게 만드는 기법으로 영화가 한 폭의 명화들로 엮여있는 느낌을 준다. 그래, 저만치서 봐야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사람이나 사랑이나... 더럽게 구질구질하고 없어보이는 불륜이지만 스크린 한 폭 뛰어넘었다고 예술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처럼.

산도 멀리서 봐야 산이고, 바다도 멀리서 봐야 바다지. 당장 그 안에 들어가면 흙먼지와 나무 줄기들, 물밖에 없지 않나. 그럼에도 우리는 거기에 뛰어들어서 기어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감각을 느껴야 그곳과 멀어질 수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에 빠지지 않아도 바다를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산을 타고 끝끝내 그 너머를 간다. 서래는 바다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산을 등지고 죽은 것이다. 막상 해준이 왔을 때 모래 언덕은 얕아져 있지만, 서래가 만든 모래 산은 그를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인내하는 서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이 매번 하던 것처럼, 하지만 또 신선한 방식으로, 날 것의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죽음을 그려낸다.

이제 깎여버린 모래 산은 해준의 몫이다. 영원히 미결로 남을 서래를 인내하며, 사랑해야 하는 그의 몫이다.


영화 미장셴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내용 몰입이 어려웠다. 짜임새도 훌륭하고 대사나 장소나 미술이나 구도나 뭐나... 추리물로서의 서스펜스는 기대하지 않아야 하고, 연출의 촘촘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런 감정 몰입이 방해가 될 수 있다. 뇌 놓고 봐야하는 대중오락은 여전히 아니다. 그래서 나한텐 사실 재밌진 않았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