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센토사를 떠나야해 <1>

1.
'쿵'
눈 앞에 사람이 떨어졌다.
떨어진 사람은 대학교 3학년의 수정언니.
떨어진 곳은 아파트 앞 라인 12층
떨어진 이유는...
언니는 왜 떨어졌을까?
순식간에 아파트 단지는 아수라장이 됐다. 구경 온 어른들과 아이들 틈바위에서 언니는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멋모르는 아이들은 또 주인공이 되겠다고 한발짝 앞으로 내딛다가 몇은 부모님의 손에 당겨지고, 몇은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건 확실히 청소년이 관람할 무언가는 아니었다. 아파트 앞 화단의 나뭇가지에 한번 걸렸던 건지, 바람막이가 찢겨진 상태였다. 뜯어진 외투의 틈새를 타고 반팔티에 박힌 유니버셜 스튜디오 로고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몇년전 중학생 때 오사카의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 언젠가 그 곳에서 어트랙션을 기다리면서, '이 어설픈 기구가 나를 떨구진 않을까' 등등 ... 머리가 으깨지는 상상을 하곤 공포에 떨었는데, 뭔가 그 이상한 상상이 타자를 빌어 이뤄진 건 아닌가, 께름칙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잡스러운 생각이 들다니.
저멀리서 수정언니의 아빠가 달려왔다. 멍청하게 벌린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를 내며. 언니의 아빠는 최인환.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시간제 미술 강사로,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났던 인물이다. 정말 지긋지긋한, 내신엔 반영도 얼마 안 되는 미술 시간을 더 지긋지긋하게 만든 인간. 수정언니의 아빠는 으레 재미없는 선 따위를 몇 십번 그리게 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남학생들의 외침따위에 얼빠진 얼굴로 헤헤대며 쉽게 자습을 줘버리곤 했다. 저 인간의 저런 혼 나간 표정은 아주 늘상 봐왔던 것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진부한 표정이라니. 최인환씬 얼빠진 얼굴에서 흘러내린 입술을 갑자기 앙 다물더니 마구 울기 시작했다. 딱히 평소의 얼빠진 얼굴과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내 눈엔 최인환씨는 매일 울고 있는 모습이었거든. 119에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이 급박한 상황 속에 최인환씨만 다른 차원을 점유하고 있는 건지 그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래도 누군가는 제정신이 박혔던 걸까 구급차는 왔고, 수정언니는 들 것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수정언니의 두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쿵'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
내 표정이 어땠길래, 언니는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 걸까.
2.
언니가 화단에 떨어진 지 3개월이 지났다. 나는 그 후로도 일상의 궤도 속에 안착한 채 지지부진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따금, 마지막 순간에 번뜩이던 언니의 눈이 생각났지만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다. 그 전보다 더. 엄마의 잔소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수정언니는 이 보잘 것 없는 동네의 보잘 것 없는 고등학교에서 미술로는 알아주는 ㄱ대학을 들어갔고, 당당히 플랜카드에 이름을 올린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웃 주민인 나는 수정언니와 아주 닮은 루트를 밟고 있었다.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나 역시 미술을 배웠고, 수정언니의 수상 실적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었다. 이건 그냥 미술 학원에서 언니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시키는대로 한 거라, 몇번은 모방작을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내가 스스로를 예술가로 느낀 순간은 그런 때 밖에 없었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있는 쪽은 끈질기게 나를 밀어붙힌 엄마였을 거다. 그래도 나는 치밀어 오는 순간을 간신히 부여잡고 일상의 소소함을 느끼는 데 정을 붙였다. 그건 미혼모로 평생을 살아온 엄마에 대한 최소한의 효도였다.
대신 12000원짜리 슬라임을 만지작대거나, 페이스북 태그를 타고 맛있는 마카롱 집을 찾거나 하면서, 정신을 싸게 팔았다. 그렇게 최대한 내 일상을 잘게 찢어놓고, 원하는 걸 잊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나름 성과도 있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멍청해졌다. 생각해야하는 걸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정말 쉽게 멍청해졌다. 미술이랄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나라는 게 없으니 그 빈 자리에 남이 하는 것만 잘 기억해 두면 될 일이었다.
그 빈자리의 주인은 대체로 수정언니였다.
수정언니 그림은 학원에 참 많이도 보관돼있었다. 언니가 그린 입시미술도 정석적이고 배울 게 참 많았지만, 언니의 그림 중 단연 돋보인 것은 언니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였다. 다홍과 바다, 보색만으로 이뤄진 최인환씨의 초상화는 바다색이 넘실대며 다홍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홍색이 어딘가에서 눈을 찌를 듯 달려들기도 했다. 두 색을 이리저리 쫓다보면 어느순간 내 시선이 최인환씨의 시선과 맞닿았아 있었다. 그는 그 그림에서 참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정언니는 별볼일 없는 최인환씨의 낯짝으로 그렇게 오래 타인의 시선을 잡아둘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
학원이 길거리에 전시해 둔 그 그림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그 학원을 등록했다. 물론 수정언니가 다닌 학원에 다닌다고 하자, 엄마가 더 좋아했다. 엄마는 정말 내가 '수정언니처럼만 자라줬으면 좋겠다'고 매일 내게 기도했다. 언니가 대단한 사람이었던 건 맞지만, 나는 그 말이 불쾌했다. 엄마의 염불은 '수정언니보다 떨어지는 사람도, 더 나은 사람도 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건 수정언니 모양을 한 관에 나를 쳐박는 말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나는 모든 자취를 검열받아야 했다. 내가 수정언니보다 더 나은 일은 그닥 없었지만, 확실히 엄마는 '수정언니보다 더 나은 나' 역시 탐탁지 않아했다. 엄마는 이 악물고 달렸던 운동회 계주에서 우승한 것조차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여자애가 흉하게...'라며 초조해했다. '수정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다리가 약해서 뛰는 건 상상도 못했을텐데. 이건 나라서 1등한 건데...' 엿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밥 생각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내 몫으로 돌아온 밥버거를 박스에 그대로 둔 채, 나는 그 운동회 날 남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언니가 떨어진 후, 엄마의 입에서 수정언니가 나온 일은 없다.
최인환씨도 학교에 나오질 않았고, 아예 이사를 가버렸다. 동대표였던 그가 사라지자 동주민들은 발빠르게 보궐선거를 진행했고, 학교엔 젊고 잘생긴 새강사가 찾아왔다. 차츰 최씨 가족의 빈자리는 채워졌다. 나로서는 좋은 일만 일어났다. 젊고 잘생긴 강사를 보며 일주일마다 새로운 활력도 얻었고, 나를 귀찮게 하던 최수정이란 관짝도 사라졌다. 볼때마다 불쾌하던 최인환씨의 비굴한 미소도 없어졌다. 내가 자기를 싫어한 걸 안 건지 유독 최인환씨는 나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그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친절이 사라진 것이, 나에겐 가장 큰 쾌재였다.
타인에게 남은 최인환씨의 자리가 좁아질수록, 엄마는 허전해했다.
엄마는 '미혼모라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온갖 동네의 커뮤니티를 점령해, 결국엔 동대표까지 달았다. 엄마는 아주 열성적인 동대표였다. 지난해 관리비 동결 집회에서 발표된 엄마의 연설은 분명 교과서에 실려도 무방했을 것이다. 최인환씨도 나름 동대표로서 평판관리를 한 건지 명절마다 동대표에게 과일바구니를 돌렸다. 거기엔 그가 그린 그림이 엽서로 끼여져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게 다 무슨 짓거리인가, 했지만 정치라는 건 어른들의 취미겠거니,하고 순순히 넘어갔다. 엄마는 그 엽서가 마음에 들었나 7개 정도를 모아 액자를 해뒀다. 인터폰 옆에 달려있는 액자는 엄마가 퇴근할 즈음이 되면 문을 열어줄 때 자연히 눈에 담기곤 했다. 참고로 난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주로 그렸는데, 제목은 쓰여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최인환 당신을 그린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 얼굴에 비해 작은 안경, 옹졸한 입술, 인중옆에 작게 난 흉터...
'지독한 자의식 과잉이군'
최인환의 낯짝 7개가 꽃과 과일로 버물여져있는 그림. 이걸 그린 변태새끼는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 건가. 50대 아저씨가 다 늙어서 자신과 꽃을 배치하고 있는 걸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엄마는 그걸 눈치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빌어먹을 자화상 연작이 자꾸 수정언니가 그린 날카로운 다홍의 초상화와 비교가 됐다.
분명 거울이 우리 인간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엄마가 좋다니, 나는 그 액자를 저녁마다 쳐다보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최인환씨가 사라진 후에 엄마는 그 액자를 뗐다. 동대표 일도 그만뒀다. 수정언니를 본받으라는 종교신도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최씨 가족의 빈자리 한 가운데 서서 황량함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안 됐어 젊은 애가...'
엄마는 엄마의 신을 동정하고 있었다.
3.
몇 개월이 더 지났고, 어느새 11월이 됐다. 찬바람과 함께 자연스레 수능을 볼 날이 찾아왔다. 미묘한 해방감과 함께 고사장을 도착한 난, 교실 귀퉁이의 낙서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색 바란 귀퉁이엔 노란색 몸뚱이에 몇 가닥 머리카락이 남은 녀석들이 그려져있었다.
'얘네 이름이 미니언즈였나'
'애초에 수능 고사장에 이런 그림이 있어도 되나'
'내가 어디서 얘네를 봤더라'
국어 종이 친 순간 나는 그들을 어디서 봤는 지 깨달았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수정언니의 반팔티에 그려진 바로 그곳에 녀석들은 버섯의 포자마냥 흩어져있었다. 직감적으로 오늘 하루가 좋게 풀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비문학을 읽을 때 즈음엔 자꾸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괴상한 소리를 내는 장면이 재생됐다. 그 후엔 아주 높은 곳에서, 애니메이션의 흔한 클리셰처럼 악당에게 쫓겨 떨어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재생됐다. 녹실녹실한 그들은 떨어지고, '꽥' 소리를 내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걸어다닐 수 있었지만 수정언니는 아니었다. 언니의 다음 장면은 없었다. 언니는 '꽥' 소리를 내지 못했다. 정육점에서 갓 도륙된 소가 다음 차례를 위해 컨테이너 벨트에 떨어질 때 처럼, '쿵' 소리만 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온통의 붉은 빛. 샛노란 미니언즈들의 몸뚱이와 날 노려봤던 언니의 붉은 머리통이 수능 시간 내내 얼기설기 뒤엉켰다. 그렇게 주황빛의 진창이 된 내 머리 속은 일순간 종소리에 하얗게 번졌다.
나는 그렇게 수능을 망쳤다.
그 다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남들과 똑같이 어영부영 12월, 1월을 보낸 뒤 남들과 똑같이 재수학원에 들어갔다. 엄마는 한번더 미술대학에 지원하길 바라는 마음에 '최저나 맞추라'고 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더이상 주황색을, 붉은 색을, 샛노랑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내 손으로 수채화 물통에 붉은 물감을 풀어 피처럼 번져가는, 그 번뜩이는 마지막 장면과 닮아있는 잔인한 파동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점수를 높여 '수정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생각만 들었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으니 언니와 다르게, 언니보다 더 높은 곳을 가고 싶었다.
재수학원엔 나처럼 쫓기며 살아온 친구들이 참 많았다. 말을 터 본 사람 중 한명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지우 오빠였다. 지우 오빠는 ㄱ대학의 경영학과를 다니다 회의를 느끼고 수험생활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지우 오빠는 나이가 많아서 그랬나, 재수생활의 친구관계로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데 다른 친구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말을 옮기지 않고, 일상사만 이야기하고, 남들 일을 더 알려고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오빠와 함께 있으면 그 공간에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스쳐지나가고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더 긴 사람이라는 느낌을 줬다. 서로를 건성으로 아는 지우오빠와의 관계는 공부가 우선인 재수생으로선 나쁘지 않았다. 남녀대화 금지라는 학원의 방침으로 학원 내에서 이야기를 해본적은 없지만,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 우리는 그런 건성의 관계를 유지할만큼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은 그 건성의 소재가 모두 떨어졌다. 날씨도 일주일 내내 같았고, 모의고사도 치룬 지 오래됐고, 선생님들도 딱히 농담을 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나는 나름의 배려로 오빠에게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질문을 건넸다.
"오빠는 대학 다닐 때 뭐 했어?"
진심인데, 궁금하지 않았다.
"나? 뭐 했냐니 질문이 너무 이상한데? 뭐 했냐는 것도 종류가 여러가지잖아"
지우오빠는 뜬금없는 질문에 웃음이 나왔는지 약간은 미소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뭐... 동아리 같은 것도 있을거 아냐 나는 대학 안 가봐서 잘 모르지만"
"음.... 그런거라면 창업?"
"창업?"
너무 본격적인 대답이 나와 당황했다.
"응 나 여행다니는 데 관심이 있어서 흥미있는 친구들 좀 모아서 여행지 리뷰 앱을 개발해봤어"
"오... 생각보다 대단하네"
"너는 참 솔직한 애라니까, 평소에 내가 얼마나 얕잡아 보인 거야?"
아직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오빠의 말엔 뼈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건방지다는 둥, 예의가 없다는 둥의 평은 질릴대로 들은 거라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지우 오빠가 개발했다는 여행 앱에 집중하고 싶었다.
"오빠가 혼자서 프로그래밍이랑 디자인 같은 것도 다 했어?"
"아니 난 기획이랑 투자 유치 홍보 같은 것만? 나머지는 다른 과 애들이랑 같이 했지. 우리 학교에선 꽤 유명했어. 학교 밖에선 딱히 인기 없었지만"
"지금도 쓸 수 있는 거야?"
"뭐 유지비가 많이 드는 앱은 아니라서... 운영을 아마 하고 있을걸?"
"아마?"
"원래는 알고리즘을 써서 맞춤 추천같은 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애들이 사업확장에 부정적이더라고. 나도 흥미를 잃어서 그냥 관뒀어. 아마 남은 몇명이 이름을 좀 바꿔서 운영하고 있을 수도 있어"
"오빠가 만든 건데 그렇게 쉽게 명의를 버려도 되는 거야?"
"에이 돈 될 것 같았으면 아주 꼭 부여잡고 있었겠지. 별 거 아니라서 그냥 애들한테 가지라 한 거야"
지우 오빠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는 도련님답게 뒷배에서 나오는 여유가 묻어있었다. 하긴 그정도 나이에 수능을 다시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그냥 나왔겠는가.
나는 어쩐지 그 여행지 어플리케이션에 흥미가 생겼다. 이 부자 도련님은 맡을 수 없는 자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곧장 집에 도착해 엄마 폰으로 서칭을 시작했다. ㄱ대학, 대학생 창업, 서지우... 어렵지 않게 한 어플리케이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세계 여행지를 누르면 유명한 관광명소를 보여주고 해당 란에 인증사진과 함께 리뷰를 작성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인터페이스였다. 대만의 지우펀이라든지, 하이난의 파인애플 몰이라든지, 어떤 리뷰가 있나 둘러보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주로 작성한 리뷰는 간단한 문체로 이뤄져 순식간에 30여 곳 정도에 대한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신기한 점은 유명하지 않은 이 어플리케이션에 헤비 유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디 sentosa1202. 그는 누르는 곳마다 자신의 인형을 들고 방문 인증샷을 남겨뒀다. 내심 여행을 많이 다닌 게 부럽다가, 장문의 리뷰를 남기는 정성에 감탄하다가, 뭐하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는 어떤 리뷰도 건성으로 남기는 일이 없었다. 장점과 단점, 한국인의 취향 적합도, 재방문 의사를 꼼꼼히 써둔 그의 리뷰는 단독으로 출판을 해도 될만한 분량이었다. 대체 누가 안면식도 없는 이들을 위해 이런 글을 써내려간단 말인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가'
고맙긴 했지만 틀어진 내 마음에 그는 이상하게만 보였다.
몇 개월이 지나 다시 수능을 볼 날이 찾아왔다. 현역시절의 트라우마로 나는 귀퉁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채 시험을 쳤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미술만 해왔던 내게는 과분할 정도의 성적이 나왔고, 엄마는 썩 기뻐하진 않았지만 이젠 나를 놓아줄 마음도 생긴 듯 대학 선택에 관여하지 않았다.
수능 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 지우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지우오빠는 생각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아 원래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 나는 당연히 싫다고 했지만, 오빠는 소개해 줄 친구가 있다고 단 둘이 먹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달라했다. '김칫국을 마셨다고 생각하나' 싶어 더 짜증이 났지만 지우오빠는 재수 시절에 그러지 않았던 걸 지금와서 몰아치나 생각이 들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결국 알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한 시간 가량의 통화로 달궈진 휴대폰을 던져두고 아무렇게나 사지를 늘어놓았다.
'이 인간 원래 이렇게 짜증났나'
내 추리로는, 대학 친구들과 한참 연락을 끊다가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쉬워진 오빠가 친구들에게 잘보이려고 나를 팔려고 하나, 라는 천박한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약속 당일 날, 내 추리는 어느정도 참으로 증명됐다. 적당히 비굴하게 굴던 지우오빠는 나를 소개할 때 이상하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공짜 술이라는 생각에 적당히 넘어가줬다. 약속 자리에 나온 사람은 지우오빠와, 지우오빠의 친구라는 영호, 진수 그리고 기억도 안 나는 박 아무개였다. 박 아무개 씨는 그 모임에서 서열 최하위였는지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기들만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늘상 그렇듯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까내리기가 시작됐다. 얘가 새내기 때 어디서 토를 했느니, 누가 더 술을 잘 마시냐느니, 학점 관리를 어떻게 했어야 한다느니... 전혀 관심 없는 주제가 수 차례 지나가고 지우 오빠가 만들었다던 여행 리뷰 어플리케이션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박아무개 씨를 제외하고 셋이 그 창업을 함께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뜻밖의 대화가 이어졌다.
"영호 얘가 그거 살려보겠다고 지 여친이랑 리뷰 쓰고 다녔잖아"
"뭘 그거 살려보겠다는 거냐 그냥 지가 핑계 삼아서 재미 좀 본 거지"
"아니 애초에 수정이 걘 니 사업에 왤케 열심히였대"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리자 저절로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귀는 양쪽으로 당겨져 얼굴이 가로로 늘어졌다.
"네? 수정이요?"
"엉 내 전전여친~ 크 수정아 보고 싶다~"
"아 이 새끼 취했네 야 뭐가 보고 싶어 2년동안 한번도 내색도 안 하드만"
"에이 좀 그렇잖아 죽은 사람 얘기하는게... 재수없게"
"뭐 재수? 이 새끼 내 앞에서 그 단어 입에 올리고 싶니?"
철없게 깔깔거리는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또 언뜻 붉은 수정언니의 머리통을 보았다. 죽었다니, 내가 아는 그 수정이 맞을 것 같아서. 술로 달궈진 몸이 빠르게 식어갔다.
"죽었다니...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내가 또 보기완 다르게 슬픈 사연이 있지. 눈물없인 들을 수가 없다"
"지랄"
"뭔 지랄 이게 얼마나 새드 스토린데. 2년 전 쯤엔가 사귀었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가 자기 집에서 떨어져 죽었어. 아직도 그 계절만 돌아오면 괜히 걔 죽은 게 내 탓같고 그렇다. 내 인생도 기구하지..."
"진짜 니가 뭔짓해서 죽은 거 아님?"
"아니라니까 이 새끼가 진짜. 야 애초에 나랑 헤어지고 나서 걔 바로 딴 남자 만났어"
"오빠 그 여자친구랑cc 였어요?"
"그랬지. 왜 너도 cc 관심있어?"
나는 민영호의 불쾌하게 희죽대는 면상을 뒤로 한 채 곧장 의자 뚜껑을 열고 외투를 챙겨 나왔다.
눈 앞이 얼얼했다. 분명 방금 먹은 골뱅이 무침 때문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