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형진이는 나를 안고 있다. 형진이는 곧 나를 선택해야 한다. 형진이는 스무 살이 된 나를 버려야 한다.
형진이의 안에 있으면 너무나 무료해서, 떠다니는 불순물 하나에 ‘버린다’, 음식물 찌꺼기 하나에 ‘버리지 않는다’를 세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형진이는 바람직한 ‘안은 사람’이라서 이따금 나에게 말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그런 시시덕대는 말로는 위로가 되질 않았다. 나는 곧 스무 살이 되고, ‘안긴 사람’으로서의 삶은 끝난다. 그 이후에는 형진이의 선택이 남는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형진이의 선택만 남는다.
형진이가 만약 복강을 찢고 나를 꺼내만 준다면, 저 밖의 사람들처럼 나도 형진이 앞에서 파닥대며 고맙다고 말해줄텐데. 형진이는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서 수술비용을 마련했을까, 무섭다고 수술대에서 도망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형진이는 안긴 사람을 꺼내줄까. 형진이는 그렇게 자비로울까?
나와도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다. 안겼던 사람들은 안은 사람 허리춤에도 안 와서, 누가 봐도 티가 난다. 키 때문이 아니더라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패배자들. 안겼던 사람들은 패배자들이다. 그래도 나보단 낫다. 그들은 꺼내져 있으니까. 성공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안은 사람들이다. 키도 훤칠하고, 뭘해도 확신에 차있고, 무엇보다 늘 행복해보인다. 나는 그렇게까지 되기 어렵겠지. 우리 아빠나 할아버지도 안은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충만한 삶을 살진 않았다. 물론 나보단 나았지만.
안긴 사람으로서 나는, 스무 해 최선을 다해 보냈다. 형진이는 식성이 고약해서 아주 매운 음식이나 아주 신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었다. 아빠는 바빠서 우리를 신경 써 주지 못했으니까, 형진이는 대강 이상한 음식을 주워 먹었다. 뭐라 타박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조용한 방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조용히 내 할 일을 했다. 덕분에 형진이는 그 흔한 배앓이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안긴 사람이면 내팽개칠 일이었다.
막돼먹은 안긴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얌전히 굴었다. 형진이도 조용한 애였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큰 소리로 웃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 정해진 일과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성실한 짝으로 궁합이 좋았다. 그의 밤은 참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어쩌면 꺼내진 뒤에도 하루쯤 같이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끔 안겼던 사람과 안은 사람이 쭉 함께 다니는 것도 봤다. 그치만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윽박을 들으면서 살 자신이 없다. 형진이는 그럴 애가 아닌 것 같지만 혹시 아나? 꺼내줄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는데.
나는 곧 스무 살이 된다. 형진이도. 형진이는 이제 다른 안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나를 뱉어낼 것인가, 이 속에 묵혀서 죽일 것인가.
또다시 조용한 밤, 몇 년만에 처음으로 내가 먼저 적막을 깼다.
“형진아”
“왜?”
“나... 보내 줄 거야?”
“...”
“형진아?”
“...”
“형진아! 제발... 나 그동안 잘했잖아.”
“가지마...”
“뭐?”
형진이가 태어나서 처음, 방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이 좁은 방이 모두 울릴 정도로 크게, 세게. 그리고는 멍이 들 정도로 제 팔을 감싸 안았다. 드나드는 공기가 적어졌다. 한참을 새된 소리로 울다가, 동이 터올 즈음 형진이는 쉰 목소리를 억지로 짜냈다. 그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는, 난처한 부탁.
“안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