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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십 여섯번째 피와 검은 발

큐키🍪 2021. 11. 23. 11:19

쪼리가 자꾸 벗겨진다. 4년간 아껴서 신었는데, 버릴 때가 된 걸까?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쪼리엔 이상이 없다. 이상해진 건 바로 나다. 오늘따라 허리에 힘도 안 들어가고, 여튼 걷기가 너무 어렵다. 더럽게 재수가 없는 날이다. 가랑이가 축축해져서 영 기분이 찝찝했거든. 롱패딩을 하도 껴입어서 땀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생리였다. 검은 옷을 입어 망정이지, 발목 끝까지 한 방울 매달려있는 피가 대롱거린다. 이 바지도 이제 끝인가. 복숭아 뼈 위로 달롱 들리는 바지 밑단이 모조리 헤져있다. 대강 피를 훑어내고 보니 발뒤꿈치에 시커멓게 때가 타있다. 좁은 화장실에 몸을 비집고 앉아 벅벅 문질러봐도 때가 영 지워지지 않는다. 이 겨울에 쪼리를 신고 나가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가 묻은 걸까? 나는 발을 다시 찬찬히 뒤집어 본다. 이상하네. 내 발은 뭔가 이상해졌다. 내일은 반차라도 써서 병원에 가야지.

어제의 바지가 수분을 모조리 뺏겨 버석버석하게 말랐다. 다리 한쪽을 넣을 때마다 사포로 살결이 갈리는 기분이다. 바지라기보단 조형물에 가까운 경도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는데, 차갑고 건조한 데님이 아직 얼어있는 몸과 불쾌한 마찰을 빚는다. 그러다 휘청.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나 있는 운동화를 꺼내든다. 양말은 미처 빨지 못했지만 쪼리보다야 맨발로 신는 운동화가 낫겠지. 어라, 이상하다. 운동화가 훌렁훌렁 남는다. 운동화에서 발을 빼본다. 발이 작아졌다. 어제보다 까맣고, 어제보다 작다. 또, 발가락 사이 사이 새살이 돋아있다. 부채꼴 모양으로 벌어지는 발가락 사이의 새살이 제일 이상하다. 잠시 멍했다가 시계를 본다. 이런 걸 보다가 출근 시간에 늦게 생겼다. 헐렁거리는 신발을 신고 마구 달린다. 신발 뒤축이, 아직 뻣뻣한 바지가 발목께의 여린 살을 마구 쳐대면서 엿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의 비가 만든 웅덩이들이 살얼음으로 변해있다. 뛰면서 그런 장애물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앞쪽으로 꽝. 세게 부딪히고. 나는 바닥에 누워 참으로 오랜만의 평화를 느낀다.

 

촤악-

“나가도 된단다.”

“...”

기태는 뇌진탕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있어야 했다. 여러 검사를 받으며 거의 하루가 지나있었고, 다니는 인쇄소에선 수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난처하게도 보호자로는 아버지가 와있었다. 기태의 남자친구는 일이 바빠 얼굴도 비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응급실 커튼 뒤에서 간호사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눈 뒤, 배려도 없이 커튼을 열어 젖혔다. 아버지의 시선은 바로 기태의 발에 꽂혔다. 기태의 발은 이제 누가 봐도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달라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듯 기태의 발을 휙 들었다.

“니가 이제 스물 다섯이나?”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었는지, 발끝에서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아버지한테는 그만하라든지, 싫은 소리를 못 했다. 그런 적은 없었으니까.

“네.”

“시집갈 때 됐다. 빨리 가래이.”

기태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기태는 아버지를 보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떠올렸다. 몇 가지 조건이 붙으면 정해진 결과값을 내는. 기태도 영 다를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대단할 정도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말도 종잡을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아저씨는 지금쯤 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다. 당장 지금은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기태의 아버지는 자주색과 은색이 배색된 주먹만한 폴더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남 서방, 오늘 좀 봅세.”

기태의 남자친구, 남기훈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아버지는 기태의 남자친구들에게 이렇게 무례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 지금 기훈이한테 전화하셨어요?”

“맞따.”

“기훈이 오늘 바빠서 여기도 못 왔는데...”

“할 말이 있어가 그란다.”

40분 정도가 지나고 자정쯤에야 도착한 기훈은 투덜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대강 기태에게 목인사를 건넸다. 기태는 이 관계가 오래지 않아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이 섭섭하지 않았다. 헤어지는 건 기태의 특기였다. 기훈과 아버지는 침상에 기태를 내버려 둔 채, 기태 없이 기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뒤 다시 커튼을 열어젖힌 기훈은 기태에게 통상적인 말을 건네다가 맹탕처럼 구는 것을 멈췄다.

“너 결혼하고 싶어?”

“어?”

당황하여 입매를 늘어뜨리는 순간 기태는 ‘무슨 소리냐’라고 타박하는 표정을 지을 걸, 후회했다. 아쉬워 보이지 않으려면 그게 정답이었을텐데.

“나는... 기태 네가 나랑 헤어지고 싶어하는 줄 알았어.”

기훈의 말은 반만 맞았다. 기태는 기훈과 더 같이 있고 싶진 않았지만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기태의 인생은 관성적이라서 기태가 무어라 어떤 힘을 주는 건 이제 와 너무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기훈은 오랜만에 기태에게 달뜬 눈빛을 보냈다. 그에게는 상대의 우위에 선 사람만이 베풀 수 있는 약간의 동정이 묻어있었다. 기태는 잠시 주저했지만, 이 흐름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싸구려 공장식 웨딩홀 한복판에 놓이게 생겼다는 걸 직감하고 용기를 냈다.

“아냐. 나 스물 다섯밖에 안 됐어. 말도 안 되잖아, 무슨 결혼이야.”

기훈은 기태의 말을 듣고 설핏 당황했지만, 확신에 찬 어조를 잃진 않았다.

“너네 아버지 생각은 다르던데, 너 이제 결혼해야 된대.”

“무슨 이유로?”

“못 들었어? 너 빨리 임신해야 된다고.”

“뭐?”

“나이가 들면 임신이 안 된대. 너네 어머니도 그랬다고 하시더라.”

기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태의 자궁 사정과 까마득해진 엄마 이야기가 어설픈 연인의 입을 경유해 올 줄이야. 까매진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어금니에 잔뜩 힘을 실었다. 오래전에 집을 떠난 첫째가 생각났다. 화내는 방법은 모두 그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그 역시 기태에겐 너무나 멀어진 사람이었다.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가. 헛구역질처럼 내뱉어야 하는 단어들이 입가에 서성대기만 할 뿐, 기태는 이제 분노가 아니라 공황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기태가 초경을 시작한 열두 살 겨울, 12월. 엄마 명자는 생애 두 번째 가출을 감행했고, 첫 번째 때랑 달리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에 명자에게 소중한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명자는 기태의 이름을 지었다. 명자는 기태가 태어나자마자 ‘귀태’라는 말을 중얼댔다. 기태의 아버지는 기태가 열 살이 될 무렵 ‘이름이 남자 같아서 놀림 받는다’고 서럽게 우는 딸에게 여과 없이 그날의 일을 전했다. ‘전라도 출신의 네 엄마가 귀를 기로 발음해서 기태가 된 것이라고, 넌 원래 귀태라고 귀태.’ 그나마 나아진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기태의 입장에선 귀태나 기태나 예쁜 이름이 아니었다, 적어도 혀를 한 번쯤은 굴릴 수 있는, 정성을 담아야 하는 그런 이름들을 원했을 뿐인데. 나이가 들고 ‘귀태’의 뜻을 알게 된 뒤에는 명자라는 탄환이 명치께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가 기태를 사랑하지 않았음은 이미 분명했다. 그렇다고 굳이 기태의 인생에 라벨을 붙여서, 영영 자신의 증오를 발화시키려 드는가. 기태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안 뒤로 울지도 못했다. 이 세계에 그의 울음을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 알아서.

명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아버지를 등지고 신당에 다녔다. 명자는 귀신을 믿었고, 특히 무당이 줬다는 버선을 제 몸처럼 신고 다녔다. 북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 아버지를 등지고 파주 감악산 근처에 터를 잡았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정해준 짝을 평생토록 괴롭혔다. 그에게 자기 아버지의 빚을 받아내는 것처럼. 계몽운동을 벌인답시고 부러 전라도 여수에 내려가 빨갱이 척결을 목 놓아라 외치는 탈북 기독교인, 명자의 아버지는 명자에게 제 마음에 맞는 경상도 남자를 짝지어주었고, 그 이후에는 손을 털 듯 명자를 떠나보냈다. 그의 세계에 명자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하지만 명자는 제 아버지에게 살을 날리는 것으로 일생을 바쳤다. 특히 명자는 생리를 할 즈음에 미친 사람처럼 집안을 들쑤셨다. 기태의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너 만나는 무당처럼 손에 방울을 달라고, 그럼 미친년 널뛰기하는 거 예상이라도 간다고, 학을 뗐다. 그가 여자의 주기에 대해 알았다면 좀 더 아량을 베풀었을까. 하지만 기태의 아버지에겐 여자 형제가 없었고, 슬하에 명자를 빼곤 아들만 넷이었다. 집안에 명자 외의 여자는 기태밖에 없었지만 그는 명자가 집에 있던 그때 생리를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명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명자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작두를 탔다. 그가 삐끗하면 어김없이 집안의 잡동사니가 날아다니다, 말았다가 했다. 둘의 서슬 퍼런 날에 베이는 사람은 명자와 아버지가 아니라 기태와 형제들이었다. 둘은 그렇게 한바탕하고 나면 또 무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갔지만, 기태나 아이들은 그들이 싸운 날과 싸우기 전날을 살았을 뿐이었다. 한 번은 첫째가 아버지가 날린 의자에 맞아 정수리에서 피를 흘려댔다. 기태는 알았다. 오빠에게도 시뻘건 분노가 전염되고 있다는걸.

명자와 첫째의 광증이 교차된 시점은 기태의 열 번째 생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명자는 밝은 얼굴로 가족들의 기분을 맞춰가며 이른 아침부터 생일상을 준비했다. 명자는 그 가식적인 평화에 목이 졸릴 정도로 조마조마했다. 초를 불고 오빠들이 생크림 케이크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때쯤 명자는 수줍은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기태는 생일잔치라는 지루한 서론이 끝나서 시원섭섭했다.

“우리 기태, 강아지 갖고 싶었지? 내가 생일 선물 준비했어~”

기태는 강아지를 갖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명자가 준비한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개였다. 50키로는 되어 보이는 골든 리트리버. 개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좁은 베란다에서 비척대며 엄마의 손에 따라 나왔다. 하루 온종일을 짖지도 않고 거기서 엎드려있었던 것이다. 개 답지 않게. 아버지는 개를 어디다 키울 거냐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첫째는 눈을 형형히 뜨고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태의 집은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둘째와 셋째는 잘 곳이 없어 거실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자고 있었고, 첫째는 따로 공부 책상도 없이 현관과 가까운 냉골에서 아버지와 불편한 잠을 청했다. 기태야 그나마 엄마, 막내와 꽤 큰 방을 차지했지만, 그곳도 셋이 같이 팔을 벌릴 수도 없을 정도로 협소했다. 다 낡은 오피스텔, 일곱 식구가 살기엔 비좁은 투룸. 그런 집에 대형견을 어디에 끼워 맞추겠다고 데려온 걸까. 기태 역시 선물을 핑계로 골칫덩이를 가져온 것이 짜증났지만 애처로울 정도로 밝은 척, 구차하게 방긋거리는 명자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첫째는 기어코, 당장 치우라고, 무슨 미친 짓이냐며 명자를 나무랐다. 명자는 웬일인지 두, 세 마디를 참다가 격해진 첫째 오빠가 개의 뒷덜미를 잡으려 들자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어디서 고함이냐며 맞섰지만, 명자를 말릴 수는 없었다. 아이처럼 울다가 마침내 꺽꺽대며 숨이 멎을 것 마냥 울분을 토해내는 그 앞에서 모두가 질색을 하고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기태는 흘깃 그 개를 봤다. 여전히 개 답지 않게 이 소란에도 낑낑대는 소리 한번을 내지 않던 개는, 맛있는 거라도 되는 양 명자의 눈물을 핥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눈 밑이 벌개진 첫째가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로라가 되었다. 혀를 이리저리 굴려야 하는 ‘로라’. 로라는 6개월에 한번은 생리를 했고 집안에 한 두 방울 피가 묻었다. 그걸 명자는 기쁜 얼굴로 닦아주었다. 강아지가 아니라 ‘개’인 로라는 기태의 짐작대로 나이가 꽤 많았다. 처음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사람 말을 곧잘 알아들었던 로라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했다. 처음 왔을 때랑 달리 배변판이 아닌 곳에 볼일을 보고, 모르는 사람들이 창밖으로 지나가면 마구 짖고. 기태가 나중에야 찾아보니 그건 치매 증상이었다. 무엇이든 빨리 질리는 명자는 결국 로라에게도 질려버렸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로라를 향해 투덜대기도 했다. 첫째는 그것을 쭉 지켜보았다.

기태는 가끔 명자가 집에서 무슨 쓸모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집은 무덤들의 집이었다. 옷 무덤, 머리카락 무덤, 설거지 무덤. 욕조의 수채구멍에서는 항상 날파리가 들끓었고 일곱 식구의 옷은 늘 빨래가 밀려 커다란 둔덕을 만들었다. 로라가 들어온 뒤로는 개털 무덤이 추가됐다. 그러고도 명자는 제 영역에 자식들의 물건이 있는 걸 못 견뎌했다. 심한 날엔 마구 화를 냈다. 첫째도 남편도 더러운 집에 화를 냈지만 명자처럼 논리가 없진 않았다. 그건 명자의 일이었잖아? 기태는 그 투룸을 떠나온 뒤에도 변호의 말을 중얼거렸다. 명자가 아예 떠난 뒤로는 청소 때문에 고성이 오가진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차곡차곡 쌓여서, 무덤이 산처럼 보일 때쯤 기태는 동생과 아버지를 두고 나왔다. 오빠들이 그랬던 것처럼.

명자는 건강검진 때만 되면 두려움에 떨었다. 용하다는 신당에서 온갖 점을 보고는 돈이 없어 굿을 못 벌인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대신 기원주문을 외며 저의 불안감을 떨치는데 집중했다. ‘대성북두칠원군(大聖北斗七元君)과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께 기원드립니다….’ 기태는 그 아래 말들을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말의 앞머리를 기억하는 것도 노란 포스트잇에 이들의 이름이 정성스레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자 글씨체가 아닌 걸로 봐선 무당이 부적 대신 주문이나 외우라 던져준 거 아닌가 싶었다. 명자가 자주 만나는 무당, 용두암 도화아씨는 계산엔 냉정한 사람이라서 단골 명자에게도 부적을 비싼 값에 팔았다. 명자는 굿을 못하니 아쉬운 대로 몇 년에 한 번씩만 치불면부를 받아왔다. 그런 날이면 기태도 명자의 향내를 맡으며 오랜만에 뒤척이는 소리 없이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명자의 첫 가출은 명자가 열두 살이 될 무렵, 겨울, 건강검진 날이었다. 의사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명자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 잃은 로라는 그날따라 치매가 심해졌는지 창문 틈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가열차게 짖어댔고, 첫째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옷 무덤에 오줌을 누었다. 하필이면 첫째는 그날따라 공부가 안됐는지 네 시쯤 집에 왔고, 로라의 발광하는 울음을 듣고 문 앞에서부터 짜증을 부렸다. 현관 앞에서 그는 명자가 치성을 올린답시고 산 플라스틱 장독대와 정화수 그릇을 엎어버리고 씩씩대며 가방을 던졌다. 로라의 오줌이 고여있는 옷 무덤 한가운데로 떨어진 가방은 ‘철퍽’ 소리를 냈고, 첫째가 부랴부랴 가방을 건져 올렸지만 이미 지린내가 스며든 후였다. 첫째는 사람 같지 않은 고함을 질러댔고, 동생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명자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좁은 오피스텔 단지의 이웃들은 부리나케 왜이리 소란들이냐며 초인종을 울려댔지만 화를 토악질처럼 뱉어내는 첫째에겐 개 짖는 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치도 없는 로라는 벨을 누르는 침입자들을 향해, 째지는 소리로, 한껏 울고 있었다. 첫째는 마침내 로라의 뒷덜미를 잡고 베란다 유리창으로 힘껏 내던졌다. 덩치 큰 로라가 반항이라도 할 수 없었을까, 기태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거실을 내다보았다. 불쌍한 로라는 안간힘을 쓰며 그 좁은 틈으로 기태와 눈을 맞춰왔다. 털이 숭숭 빠진 로라의 얼굴은 코가 긴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래서 기태는 용기를 내 문을 크게 열었다. 로라는 다리를 바둥대며 방으로 애써 들어가려 했지만, 첫째의 손아귀에 순식간에 걸려 들어갔다. 첫째는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로라의 복부를 세게 찼다. 우두머리가 누군지 확인시켜주듯이.

로라는 몇 번의 발길질 끝에 조용해졌다. 방음이 안 되는 오피스텔, 이웃 주민들은 더 이상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고. 숨을 고르는 첫째의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첫째는 로라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네 명의 아이들이 뭉쳐있는 꼴이 벌레 같아서, 구역질이 나왔다. 그에게 로라의 시체에 구더기가 고이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첫째는 이제 로라의 무덤이 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을 밀치고 명자의 방에 들어가 장롱 밑의 흰 봉투를 꺼냈고, 아직 오줌이 묻어있는 가방에 외투 몇 벌을 욱여넣은 채로 그는 도망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막내는 엉엉 울고,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한창 문제지를 날랐던 아버지는 전화를 받을 틈이 없었다. 기태만이 혼자 로라를 보았다. 감기지 않은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왔고, 로라를 보았다. 그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로라를 베란다 밖으로 꺼내 놓았다. 둘째에게 자초지종을 물은 후에 그는 덤덤하게 첫째를 찾겠다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날 오후가 돼서야 기태는 첫째의 휴대폰에서 무작정 명자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 버튼을 누를까, 누른다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기태는 머뭇대다 다시 로라를 보았다. 로라는 얌전히 누워있었고 어쩐지 살아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기태는 용기를 냈다. 찰칵. 금이 간 베란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로라의 모습이 찍혔고, 그 사진을 명자에게 보냈다. 밤이 되자 코끝이 빨개진 명자가 짧은 가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명자는 우두커니 현관에 서서 고작 다섯 걸음도 안 될 것 같은 베란다까지의 거리가 걸을 엄두도 안 난다는 듯,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그 앞에는 배를 곯은 아이들이 쉬어버린 미역국을 떠먹고 있었는데, 명자는 그저 멍하니 베란다 너머만을 보았다. 날이 추워서 로라의 부패는 더디게 진행됐다. 명자는 아버지가 돌아와서야 몸을 움직여 제 옷가지를 로라에게 덮어주었다. 아버지는 첫째를 찾지 못한 것 같았고, 집안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명자를 나무라지 않았다. 집안에 조용한 불안이 서성댔다. 다음날 명자는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를 명품가방을 가져왔다. 명자의 마지막 남은 목돈을 다 털어서 사온 것 같았다. 또 너무 비싸서 쉽게 못 사는 치불면부가 댓 장은 있었다. 그리고 명자는 로라의 사체와 가방, 부적을 100리터 배낭에 구겨 넣었다. 명자는 그걸 모두 짊어지고 기태의 손을 꼭 잡은 채 감악산을 등반했다.

한겨울, 기태는 빼꼼 나온 얼굴이 순식간에 부르트는 것을 느꼈다. 너무 아프고 추웠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의연하게 산을 오르는 명자의 등에 말을 걸 수 없었다. 150미터나 되는 출렁다리가 겨울 바람에 휘청댔고, 거기서 또 악귀봉까지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을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꼭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법한 길을 골라 나아가는데, 기태는 나뭇가지에서 후두둑 눈 떨어지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저가 나뭇잎을 밟아 낸 소리에도 심장이 섬칫해지는 것이 이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제 앞에 있는 것이 명자인지 귀신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무가 빽빽이 서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곳, 명자는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작은 삽으로 손이 터질 때까지 구멍을 팠다. 기태는 멀뚱히 보고만 있다가 명자의 손이 터지는 것을 보고 나뭇가지를 주워와 그를 도왔다. 딱딱한 땅에 어설프게 구멍이 생기고, 명자는 로라와 가방, 부적을 한데 모아 그 구멍에 넣었다. 그리고 그 위를 흙과 눈과 낙엽으로 덮어주었다. 그러자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가 버릴 것같은 작은 무덤이 만들어졌다. 명자는 그 앞에서 제 나름의 주문까지 외워댔다. 그리고 그는 기태에게 물었다.

“수자가 아니었을 거야. 응?”

간절하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는 명자에게,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기태는 명자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 말을 끝으로 간단한 제의가 끝났고, 모녀는 어두운 산길을 함께 헤쳐나왔다. 기태는, 그래선 안 됐겠지만, 뿌듯했다.

다음날 기태는 초경을 시작했다. 명자는 생리대 이용방법을 알려주고, 배란일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집을 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기태는 가끔 그날 명자의 물음에 긍정한 것을 후회했다. 안방에는 이후로 기태와 막내가 살았다. 둘째와 셋째가 독립을 한 뒤론 막내가 거실로 나갔고, 기태 혼자만 그 방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막내는 기태와 다섯 살 차이가 났다.

 

“아니야.”

“뭐?”

“우리 엄마, 거의 마흔에도 애를 낳았어. 막내 낳았을 때가 서른 일곱이었다고.”

“그럼 아버지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거야?”

“나도 몰라. 아버지가 우리 엄마에 대해 뭘 알겠어? 어쨌든 나는 결혼할 생각 없어, 애 낳을 생각은 더 없고.”

“나랑 결혼할 마음 없어?”

“아니 요즘 세상에 스물 다섯이 결혼하는 경우가 어딨어. 이제 그만하자.”

“헤어지고 싶어 나랑?”

“결혼 못 해서 헤어져야 하는 거면, 그냥 그러자.”

기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꾹 눌러대며 병상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커튼을 열어젖히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들어왔다.

“말라꼬 일을 망치나?”

“아버지야말로 무슨 소릴 하셨길래 쟤가 저래요.”

“니 이모맹치로 되고 싶나? 빨리 아를 낳아야 강새이 안 될거 아이가?”

“강새이?”

아버지는 로라를 두고 강새이라 말했다.

“개가 된다고요?”

“맞따. 니 발 보아하니 시작이 된기라.”

“네?”

“가시나 말이 많노, 기양 니 외가 쪽 피가 그렇다, 나이 들면 개 된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기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반박을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다.

“고마 일라, 여서 먼 말을 하긋나.”

아버지는 기태에게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를 수면 양말을 단단히 신겨준 뒤에 택시를 부르러 나갔다. 요란한 하루가 멎어가고 있었다. 개가 된다니, 그런 헛소리 믿을 게 못 됐지만 아침에 봤던 까만 발이 생생했다. 바지를 찾아서 입는데, 분명 이 바지가 발목 위까지 오던 것이 기억이 났다. 이제는 발등을 살짝 덮을 정도다. 다리도 짧아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말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얌전히 옷을 갖춰 입고 아버지가 불러준 택시를 타고, 오랜만에 그 투룸으로 돌아갔다. 스무 살이 된 막내가 기태를 반겼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명자의 방을 치우곤 기태에게 자라고 했다. 내일 말하자고. 기태는 명자의 장롱을 쳐다보며 밤새 눈을 끔뻑댔다. 아침, 평소대로 출근 준비를 하다가 발을 보곤, 아버지의 남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아버지도 출판단지에 물량을 확인하러 가야 한다며 트럭에 같이 타라고 했다. 해줄 말이 있다고.

 

“여수 할배 알제? 여즉 성성하대, 시위도 한다카고.”

“아버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할배가 와 그러고 있는 거 같나? 집엣사람 찾는다고 기란다. 아들 다섯 낳을 때만 해도 붙어 살다가 쌍두이 낳고 도망갔다카대.”

“우리 엄마 쌍둥이였어요?”

“맞따. 나도 한번을 못 봤는데 갸는 결혼도 안 하고 지 엄마 찾겠다고 전라도에 있었다고 하대? 그래서 갸도 강새이가 되어부렀나봐. 그거 듣고 니 엄마 울고불고 난리를 쳐가 전라도 강새이들 다 뒤비고... 그라가 머 어데서 한 마리 끌고 와 가지고 지 동생이라 캤다. 갸가 로라다. 글고 할배한테서도 전화가 온 기야. 수자 거깄네? 하고.”

“아버지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사람이 개가 된다잖아요.”

“알고 게론한거 아니긋나? 할배 집에 가봤는데 똑같이 생긴 누렁 개들이 천지삐까리야. 하이고... 단단히 돌아삔기지 하고 첨엔 안 믿었던 기라, 그라가 명자랑 도망갈라 캤는데 명자가 지 발을 보여주는기야. 사람 발이 아닌 거를...”

“지금 제 발이랑 똑같았어요?”

“아니다, 더 심했음 심했지. 명자 발은 온통 까매가, 물갈키가 달려있었다. 글고 달가지까지 싹 노르스름한 털이 돋아있었던 기여. 지랑 지 동생이 달거리를 백 오십 여섯 번 하믄 개가 된다꼬. 달거리를 안하믄 개 되는거이 멈추고. 딸 낳음 완저이 멈추고.”

“전 엄마 그런 거 본적 없어요.”

“하모, 니 명자가 버선 벗은 적이 있대? 안 말할라 카더라, 그라가 나도 안 말했지. 말해서 좋을 거이 뭐가 있겠나.”

“저한테는 말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녜요? 딸한테 물려주는 거면요.”

“느그 어매는 끝까지 니도 그런다는거 인정 안 할라캤다. 먼 방도가 있겠지 싶대. 그래서 매양 병원 가가지고 우짜믄 되냐고 묻고.”

“병원 건강검진이고 뭐고 다 그것 때문이었어요?”

“기래, 명자가 애당초 그리 지 몸 챙기는 아가 아니여.”

“무슨 소리에요, 자기 몸 건강해지라고 기원주문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기 다 니 강새이 안 되라고 한 기지, 지대로 못 들었나? 우얄끼고 이제 니가 강새이 되는기지. 니도 딸만 낳으면 되는 기여.”

“...”

기태는 멍하니 창 밖만을 보았다. 어느새 익숙한 골목이 보이고, 인쇄소가 보였다.

“기태야.”

아버지 입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나온 것 같은 제 이름에 기태는 살짝 닭살이 돋았다.

“기태야, 나 명자가 안 밉다.”

“...”

“니도 안 미워해주믄 안 되겠나?”

 

기태는 대답 없이 트럭에서 내렸고, 입김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도 딱히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주소가 적힌 작은 쪽지를 툭 건네곤 바로 자리를 떠났다. 예상보다 빨리 사무실에 온 기태는 직원들한테 무단결근에 대한 양해를 구하러 다녔고, 점심시간에는 생리를 멈추게 해준다는 미레나 시술을 검색하곤, 영구적이지 않다는 말에 자궁적출수술까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자궁근종같은 게 있어야 의사가 해줄 법한 수술이었다. 오후에는 4도로 발주된 책이 2도로 인쇄되었다는 출판사의 전화에 인쇄소가 발칵 뒤집혔다. 알고 보니 그것은 기태의 잘못으로, 단골 출판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청소년 문학책의 인쇄 발주서를 잘못 확인했던 것이었다. 그날따라 색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기태는 혼이 빠진 채 부랴부랴 도비라부터 다시 확인했다. 마젠타가 빠진 도비라는 너무 칙칙해서 전공 서적같았다. 이대로면 청소년 서적으로 팔리긴 글렀지. 기태는 고등학교 시절 새빨간 틴트를 바르던 제 친구들을 떠올렸다. 남은 틴트를 제 볼에 문댄 뒤 교실 뒤 거울 옆이나, 교과서 빈 공간에 쓱쓱 문지르던 친구들. 그리고 자신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미워하지 말라니, 대체 어떻게? 기태는 자기가 실수한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책더미를 밀어버렸다. 아예 도비라를 다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두고 쫓기듯 퇴근했다. 죄책감은 너무 무겁고 오늘의 자신은 너무 작아서 도무지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내일이 오면 오늘 미뤄둔 일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겠지만, 기태는 그제야 제 인생이 너무 큰 변곡점을 맞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일로 기태는 꽤 큰돈을 배상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예 이대로 나가서 돌아오지 말아버릴까, 어차피 개가 될 거면. 소매 끝단이 헐어버린 패딩을 챙겨 나가는 길에 기태는 자꾸 극단적인 선택지를 가늠해보았다.

 

다섯 시쯤 노을이 지고, 기태는 아버지가 준 쪽지의 장소로 찾아갔다. 옆에 강이 흐르는 으슥한 공터에 컨테이너 몇 개가 마당을 두고 빙 둘러져 있었다. 거기엔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개들이 여럿 모여 있었고, 녹슨 현판을 읽어보니 그곳은 유기견 보호센터였다. 또 거기엔 첫째가 있었다. 첫째는 이미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듯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에게 사무적으로 ‘봉사하러 왔냐’ 물었다. 기태는 어쩐지 아버지가 그걸 시킨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뜬장에 있는 개들은 하염없이 오줌을 싸댔고 시멘트가 대강 발라진 바닥은 똥이나 오줌이 잔뜩 고여있어 냄새가 지독했다. 기태의 하나 남은 운동화에 온통 배설물이 묻었다. 아버지가 준 수면 양말에도 스물스물 액체가 스며들었고, 날이 추워 발가락이 에이는 통각에 고통스러웠다. 아예 발을 잘라버릴까, 뱀독을 빼는 것처럼 그 부위를 도려내면. 하지만 어디 물린 것이 아니니 그건 의미가 없을 터였다. 밖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니 대형견들이 모여 있었다. 사모예드, 시베리안 허스키, 진돗개... 골든 리트리버. 기태는 로라를 떠올렸다. 로라는 정말 명자의 동생이었을까. 기태는 대문을 열고 골든 리트리버에게 다가갔다. 개는 기태의 모습에 이빨을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대문 너머로 도망쳤다. 그리고 대문 밖 좁은 길을 한달음에 뛰어넘더니 강에 몸을 던졌다. 얼이 빠져서 멍하니 서 있으니 첫째가 달려와 개를 쫓으려 하다 물에 들어간 것을 보고 포기해버렸다.

“미안해... 안 잡아도 될까? 119라도 불러야 하나.”

“됐다, 번거롭게. 저렇게 나간 개들 많다. 쟈는 물갈퀴도 달려있어서 수영 잘한다. 지가 가고 싶어서 갔는데. 문제 있음 돌아오게 돼있다.”

첫째는 빨리 포기를 하는가 싶더니, 이젠 점으로 보이는 그 골든 리트리버의 뒤를 아무말도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 개는 정말 수영을 잘했다. 첫째는 개가 완전히 사라져서야 뒤를 돌아 네 몫이라며 낡은 봉투에서 다 구겨진 사진과 종이 한 장을 기태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훽하니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기태는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렸고, 피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우수수,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에는 두 명의 명자가 있었다. 한 명은 기태가 아는 명자가 분명한데, 한 명은 기름칠한 머리에 땡땡이 스카프까지 두른 것이 보통 멋을 낸 게 아니었다. 그래서 통 명자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마치 한 몸처럼 꼭 서로를 부둥켜 안아서, 세상에 서로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기태는 그 여자가 수자라는 걸 알고 샘이 났다. 다 구겨진 종이 한 장에는 제멋대로 미안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곤 자기도 무서웠다고, 살고 싶었다고 쓰여 있었다. 어디에도 사랑했다는 말은 없었다.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기태가 기대한 말은 한 줄도 적히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어금니를 짓누르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막내가 기태의 이름을 힘껏 불렀다.

“누나! 기태 누나!”

“예빈아.”

막내는 기태가 손에 쥔 것을 보고 눈썹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너도 이런 거 받았어?”

“… 우리 집에 로라가 둥지 틀었던 데 생각나?”

“엄마가 헌옷 못 버리고 모아놓은 거기?”

“뭘 아직도 엄마 탓을 해. 우리도 신경 안 쓰고 내버려 뒀잖아. 로라가 유독 거기를 좋아했어.”

“근데 거기는 왜.”

“엄마가 그 밑에 자기 물건을 모아놔서, 로라가 엄마 냄새를 맡고 그렇게 좋아라 했나 봐. 밑에 막 잡동사니가 있더라. 그리고 그냥 종이 쪼가리에 선 직직 그어져서 몇 번이고 고쳐 쓴 편지가 있었어. 엄마가 자기는 좋았던 게 동생밖에 없었대. 그래서 자기는 당장에라도 혼자 바다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기태 동생 낳아주려고 그 집에서 더 살았대.”

“너도 엄마한테 이용당한 거네”

막내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는지 낮은 소리로 흐흐댔다.

“뭐가 웃기니?”

“그냥 너무 엄마다워서. 난 엄마 기억 잘 안 나는데, 그 투룸에 살면서 대강 알겠더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건 없는데 걱정은 많아서 주먹구구로 떼우는 거야. 구멍 난 방충망에 덕지덕지 테이프 붙이고. 뭣도 모르면서 할아버지 엿 먹이겠다고 집 근처에 있는 무당집 다니고… 그냥 그렇게 잡히는대로 산 거지 나 낳은 것도.”

“나는 막 화가 나. 너 화 안 내는 거, 이상한 거야.”

“누나. 난 신명자 씨를 사랑하지 않아. 누나도 그만해.”

“무슨 말이야.”

“누나 사랑 돌아올 일 없어. 날 낳아준 것도 누나한테 미안해서지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 말을 하는 막내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동시에 너무 단단해서, 기태가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난 덕분에 살아있어서 좋은 일도 꽤 많았어. 그러니까 엄마가 시킨 일, 그 단순한 거, 못 해줄 거 없지. 누나, 집에 돌아와.”

단호한 막내의 말에 기태는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자기가 개로 변한 그날부터 가슴에 세워진, 곧은 심지가 달랑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 이물감 하나가 막내의 손을 힘껏 밀어냈다.

“나는 말야, 오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사랑? 글쎄, 이건 그냥 빚을 갚는 거 아냐? 로라 그렇게 된 게 미안해서.”

“미안하기만 하면 그렇게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거든. 미안하다고 미워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엄마… 물갈퀴 달린 거 하나 믿고 바다로 갈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 아니야.”

“그치 겁쟁이지.”

“그니까, 가고 싶은 데로 안 가고 가야 하는 곳으로 갔을 거야.”

“엄마 있는데 알아서 뭐하게.”

기태는 막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말간 얼굴에 멋을 부릴 줄 아는 게 꼭 스무 살 같았다. 예전에는 이 얼굴에 명자와 화장을 시켜 준 적도 있었다. 고추장 색의 아줌마 립스틱을 잔뜩 바른 막내는 베란다 창을 거울 삼아 애교를 부렸고, 기태와 명자는 그 모습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젠 그 작은 아이가 기태만큼 커서 기태에게 손을 내밀어주겠다 말한다. 하지만 기태는 개가 되기 전에 명자에게 물을 말이 많았다. 명자처럼 살다간 못 해줄 그런 말이 있었다.

“엄마는 여수에 갔을 거야.”

기태는 어느새 캄캄해진 하늘에 눈이 소복히 쌓여있던 감악산의 하산길을 떠올렸다. 눈이 반사판 역할을 해줘서 달빛이 자그맣게 흐르던 그 좁은 길, 명자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기태는 숭숭 비어있는 명자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돌아가면 엄마에게 모자를 씌워줘야지,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