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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백오십 여섯번째 피와 검은 발 쪼리가 자꾸 벗겨진다. 4년간 아껴서 신었는데, 버릴 때가 된 걸까?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쪼리엔 이상이 없다. 이상해진 건 바로 나다. 오늘따라 허리에 힘도 안 들어가고, 여튼 걷기가 너무 어렵다. 더럽게 재수가 없는 날이다. 가랑이가 축축해져서 영 기분이 찝찝했거든. 롱패딩을 하도 껴입어서 땀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생리였다. 검은 옷을 입어 망정이지, 발목 끝까지 한 방울 매달려있는 피가 대롱거린다. 이 바지도 이제 끝인가. 복숭아 뼈 위로 달롱 들리는 바지 밑단이 모조리 헤져있다. 대강 피를 훑어내고 보니 발뒤꿈치에 시커멓게 때가 타있다. 좁은 화장실에 몸을 비집고 앉아 벅벅 문질러봐도 때가 영 지워지지 않는다. 이 겨울에 쪼리를 신고 나가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가 묻은 걸까? 나는 발.. 더보기
형진이는 나를 안고 있다. 형진이는 곧 나를 선택해야 한다. 형진이는 스무 살이 된 나를 버려야 한다. 형진이의 안에 있으면 너무나 무료해서, 떠다니는 불순물 하나에 ‘버린다’, 음식물 찌꺼기 하나에 ‘버리지 않는다’를 세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형진이는 바람직한 ‘안은 사람’이라서 이따금 나에게 말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그런 시시덕대는 말로는 위로가 되질 않았다. 나는 곧 스무 살이 되고, ‘안긴 사람’으로서의 삶은 끝난다. 그 이후에는 형진이의 선택이 남는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형진이의 선택만 남는다. 형진이가 만약 복강을 찢고 나를 꺼내만 준다면, 저 밖의 사람들처럼 나도 형진이 앞에서 파닥대며 고맙다고 말해줄텐데. 형진이는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서 수술비용을 마련했을까, 무섭다고 수술.. 더보기
가로세로높이 사람의 부피는 무엇으로 잴까? 수학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보고 있자면 이상한 궁금증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수학을 잘하지 못해서 딴생각이 난 걸까. 평생 잴 일 없을 원기둥보다야, 내 옆의 짝꿍이 더 궁금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서는 자꾸만 책상의 금을 넘는데, 대체 얼마나 부피가 클까. 돼지. 어쩌다가 걔랑 팔이라도 닿으면 접촉면을 중심으로 파동처럼 소름이 번져나갔다. 근데 또 그런 날이 꽤 많았다. 걔가 너무 뚱뚱해서다. 그러면 걔는 꼭 실색한 얼굴로, “미...미안...”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가끔, 그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이 뻗쳐서 화장실로 달려나갔다. 선생님도, 애들도 다 나만 이상하게 쳐다 봤지만 그 식도에 가득 차는 역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서 시원하게 토를 게워내진.. 더보기
코레 추천노래: 비발디, 나의 사랑하는 님 만나리 (Vedro con mio diletto) https://youtu.be/yF4YXv6ZIuE 지수 씨는 일요일, 오픈 시간에 돼지갈비를 두 판째 먹고 있었다. 스무살 지수 씨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저런 몸으로 애를 가졌을까 싶었다. 아니면 저런 몸이라서 삼촌의 애를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삼촌의 나중 행보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후식을 먹을 때 즈음, 지수 씨의 동서는 그의 몸을 보며 한마디씩 꼭 덧붙였다. “아직도 처녀 때 생각해서 관리해?” 엄마의 묘한 말에도 지수 씨는 그저 수줍게, 자랑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어색하게 굳어있던 안면에 혈기가 도는 건, 명절 연휴 2박 3일 중 딱 그 한순간뿐이었다. 지수 씨의 동서들은 바삐 눈을 .. 더보기
내 방 “후욱” “훅!” 아무리 불어도 도대체 커지지가 않는다. 오늘 낮에 본 종수 놈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가 않는다고. 개자식. 그런 걸 학교에까지 가져올 이유는 뭐람? 주말에 놀이공원을 갈 거니 말 거니 할 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더니, 거기서 너구리 풍선까지 들고 왔다. 그것도 뜨는 거로! 거들먹거리는 얼굴에 한마디 쏘아주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지한테 잘 보이는 애들한테 그 헬륨이니 하는 걸 먹일 땐 정말 가관이었다. 조무래기들 몇 명 모여서 되도 않게 이상한 목소리 하나로 우월감을 부리는 꼬락서니하곤. 종수 놈도 지금쯤 그 넓다던 제 방에서 쭈글쭈글해진 풍선을 부여잡고 있을까? “후우욱!” 한 번 더 세차게 입김을 불어본다. 구멍이 이렇게 커서는 도저히 공기가 차질 않는다. 들어가는 족족 어디로 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