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노래는 Charlie Puth의 <if you leave me now>

가열된 아스팔트 위의 하교길을 걷다보면, 어린 발은 어느새 바닥에 눌러 붙고 있었다. 열기에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한발 한발, 떼다보면 꽤나 가파르던, 우리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반드시 도착하곤 했다.
어린 시절 하교는 그 하나의 경사길만으로 낭만을 품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꽤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 위와 벌어지던 경사길 옆으로 이웃 J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J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한 낮에도, 밤중에 품은 냉기와 주차장 특유의 매캐하고 쌉쌀한 향기를 뿜어냈다. 선풍기 바람에 스칠 때 소리를 내며 떨리는 파동을 만드는 것처럼, 나는 그 주차장 틈 사이로 ‘아~’하는, 낮고 굵은 소리를 퍼뜨리는게 좋았다. 그렇게 토해낸 내 속의 열기가 주차장의 탁한 냉기로 바뀔 때 쯤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냉기는 열기가 오만곳을 침범한 뜨거운 여름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세계, 지붕도 벽도 없었지만 나에겐 가장 사적이었던 지하 주차장과 경사길.
경사길을 즐기는 또 하나의 오락거리는 중력이었다. 몸을 조금씩 기울이면 앞으로 자꾸 힘을 받았고, 어린 난 중력이라는 이름을 모른 채 과학을 즐기곤 했다. 과하게 욕심을 낼 때면 무릎이 다 까지도록 크게 넘어졌다. 부끄러움과 통증에 얼룩진 눈 앞엔 달팽이가 그늘에 숨어 눈을 맞춰줬다. 아직 햇볕을 벗어나지 못해 몸이 바싹 마르던 달팽이는, 온 힘을 다해 경사길 옆 주차장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달팽이들 앞엔 나처럼 아래 경사가 없어 안타까웠다.
어린 나는 주차장의 냉기를 들이마시며 안전한 위치에서 그들의 질주를 구경했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유년기의 단편 속에서 달팽이들은 숨가쁜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척한 궤도를 발끝으로 비빌 때면, 후신경에 들러붙는 축축한 비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과 달팽이, 아주 더운 여름날이 품고있는 퀘퀘한 냉기의 조각들.
초등학생과 달팽이는 아주 닮았다. 제 나름 온 힘을 짜내며 전쟁같은 하루를 치뤄내지만, 아주 느리게 가는 시계바늘에 짓눌려지는 것이 닮았다. 둘은 똑같이, 무너지는듯한 더위에 퍼져버린 팔과 다리를 끌고다니며 어떻게든 하루를 마무리다. 달랐던 건 질릴 정도로 지겨웠던 하루가 끝나고 나면 어느샌가 한뼘 자라있던 나. 아무리 달려도 키가 자라지 않았던 달팽이들.
발맞춰 자라주질 않는 달팽이들 대신, 내게는 비슷한 크기의 친구들이 생겼다. 세상 속에서 딱 나만큼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던 S. 하지만 또래에게 S와 나의 부피는 너무나 달랐다. 똑부러지고, 공부도 잘하던 S에게 우리들은 어떤 동경을 품고 있었다. 나도 그런 S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 쳤고, 다른 친구들이 그에게 말을 걸 때면 불쑥 튀어나오는 시기심에 얼굴을 붉히곤 했다.
어린 나는 몰랐다. 그 아이에 대한 정확한 마음을, 내 감정을 대기 중에 옮기는 방법을. 마흔 명이 들어 찬 교실에선 나는 그와 단둘이 있을 수 없었다. 딱 나만큼의 부피는 그에게 너무 아쉬워, 그는 항상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필요로했다. 나는 그와 맞대어 설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딱 나만큼의 세계에 그를 초대했다.
“S야, 오늘 학교 끝나면 나랑 같이 집 가자”
“갑자기 왜? 나 보경이랑 가기로 했는데…”
“한번만,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답지않게 칭얼대며 보챘던 탓일까, S는 약간 언짢은 미간을 보여주며 투덜댔다. 평소같으면 겁이 났겠지만 나만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생경한 감각은 어린 날 들뜨게 만들었고, 난 S의 감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하교길만을 기다렸다.
기다렸던 하교길. 짧은 초등학생의 보폭으로 한참을 걷다보니, 들뜬 마음은 열기에 눌려 밑바닥에 숨어버렸고, 어느새 나는 땀을 너무 많이 흘린 S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S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풀었던 미간을 다시 팽팽하게 조였다.
“언제까지 가야 돼. 보여줄 거 있다면서”
“미안… 좀만 더 가면 나와”
“내 집은 이미 지나친 거 알지?”
S의 타박을 들으며 도착한 경사길은 이미 나만의 그 경사길이 아니었다. S의 분노 섞인 기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그렇게 좋아했던 지하 주차장의 매캐한 냄새나, 달팽이들의 궤적따위를 시시하게 만들어버렸다. 지하 주차장 쪽으로 얼굴을 대면 시원하다느니, 이쪽에 달팽이들 다섯 마리가 엉켜있었다느니, S의 관심을 끌기 위해 주절주절 신기하다고 늘어놓는 말에도 진심은 없었다. 숨막힐 정도로 날 옥죄어오던 S의 미간이 밀물처럼 나만의 세계를 침범해왔다.
지하주차장의 냉기를 한참이나 맡다가 기운을 차린 S는 입을 우물거리다 아리송한 말을 뱉었다.
“넌 좋겠다”
별 볼일 없는 하교길을 끝내고 난 후에도 S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S를 또래 사이에서 S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때때로 S의 시중을 들다가, 간신히 말을 섞기도 하면서 그와 멀어져갔다. 어느새 경사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됐고 숨쉴 틈 없이 매꿔진 타르덩어리들이 달팽이들을 생매장시켰는지, 달팽이들도 자취를 감췄다. 보폭이 큰 걸까, 성장하며 시간이 더 빨리 간 걸까, 하교길의 더위도 짧아져만 갔다.
한번은 운이 좋아서 그 아이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친구들이 흩어지고, 집이 가까웠던 나만 혼자 남아 늘상 그랬던 것처럼 S의 말시중을 들어줬다. S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 아이돌이나, 드라마따위를 소개해줬는데, 나는 정말 하등 관심 없었지만 S가 좋아한다니 뭔가 멋져보였다. 내가 버블헤드처럼 고개를 끄덕거리자 S는 약간 으쓱했는지, 그 전엔 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풀어줬다.
지역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언니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같은 것을 말이다.
나는 사실 S의 이야기보다는 특별한 S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몰입해서, 조금은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S가 울었다.
그 애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집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내가 부럽다고, S는 한참을 울었다.
그 뾰족한 이목구비가 다 일그러질 정도로 벌겋게 울어대는 S에게, 나는 후다닥 달려 휴지를 가져왔지만 휴지따위로 그 아이의 울음을 막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의 등을 토닥인 건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S는 나를 더 멀리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그 아이는 어른스럽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그런 S의 태도를 이해하긴 무리였다.
거의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저만치 물러간 S에게 처음으로 화가 났다.
이게 내 유년기의 마지막 기억이다.
유년기가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서 이따금씩 어리광을 부렸지만, 이 빡빡한 세계에 내 부질없는 울음은 통하지 않았고 난 좁아진 세계에서 쫓겨나듯 어른이 되었다.
나는 사실 S가 가끔 죽일듯이 미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진 S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싶었다.
예쁘고, 하필이면 같은 반이 자주돼서 내 1등을 뺏어가고, 명문고에 들어간 언니가 있는 S가 사라졌으면 했다.
하지만 그 아이만 내 것이 된다면 그런 거 따위 없어도 다 가진 기분이 들 것 같아, 누구보다 그 아이가 필요했다.
S가 가끔은 나를 깔본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다.
친구가 없을 때만 나를 찾고, 내가 조금만 어리숙하게 굴어도 바로 나무라고, 친구들과 놀 때면 나를 은근히 따돌린다는 것도.
그래도 나한텐 그 아이가 가장 소중했다.
그렇게 원했지만 결국 갖지 못한 S는 내 안에서 자성을 띠고 자라나, 나는 그 아이와 비슷한 사람을 볼 때면 하릴없이 인력을 느낀다.
고작 내가 그 아이에게 토닥거림이라는 동정을 주어서일까. 그 아이는 떠나며 내게 이상한 주술을 건 게 분명하다.
나를 하찮게 여긴 S처럼, 누군가 나를 무시할 때면 ‘그도 S처럼 내게 특별한 이는 아닐까’하는 상처입을 기대를 품으며,
나는 이상한 방랑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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