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안 쓰곤 버틸 수 없는 날이 있다. 지금은 새벽이니 어제라고 말해야겠지만 시간이 얼마 지난 건 아니라, 오늘로 말하고 싶은 날의 이야기다.
난 곤죽이 되도록 남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진창을 구르고, 또 휩쓸리고 살아간 하루였다. 이런 날은 남의 소리에 때때로 어, 어 만 해주면 쉽게 풀리는 날이다. 그러지 않고 혼자 꽁꽁 싸매고 누워있던 날이 퍽 기쁜 날은 아니나, 오늘같은 날에도 기쁘진 않다. 우울하게 살아온 사람은 관성대로 우울하게 살아서 기쁘고 우울하고를 따지는 건 포기해야한다. 분명 우울한 날이 더 많을텐데, 셈을 하기 시작하면 우울함이 크다는 것만 와닿는다. 우울의 결들을 잘 쓰다듬으면서 튀어나오지 않게 눌러주는 것이 최선일테다. 혼자 있는 날에는 혼자 내 얘기를 들어주며 시시각각 우울을 풀어주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도저히 글을 쓰지 않곤 못 버티겠다. 단말마의 어, 어가 스스로에게만은 통하지 않아, 돌부리에 걸린 마냥 정신이 퍼뜩 드는 그런 시간대가 있으니까, 나는 방금 그랬다.
과외 두 개를 끝내고, 창업 회의를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과제를 하며 오늘 나는 대체로 어, 어 했다. 그러다가 김영민 선생님의 <시> 관람평을 봤는데, 아 정말 너무한 사람. 어설프게 작가 흉내를 내는 사람은 작가를 비판하는게 쉽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대강 볼 수는 있으니까, 근데 힘 안들이고 쓴 글이 번쩍번쩍 빛이 날 때, 이건 정말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거다. 흠을 잡으려고 해도 힘 빠진 글은 부여잡을 수 조차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내가 쓸 수 없는 글이구나 하고, 그리고 난 또 내 길을 가야한다. 잘 쓴 글을 본다는 건 그런거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면 그런 글을 보고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거다.
선생님은 시를 쓴다는 걸 얘기하셨지만, 나는 아직 그 영화도 시도 잘 모르겠어, 나는 분노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생각이 닿는 데까지, 그러니까 한 6살 정도. 유치원을 옮길 때 선생님이 해준 말이 내 기억의 첫 장면이니까 딱 그때부터. 난 화가 나있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은 맨 앞에 앉는 날 나무랐다. 그때는 나댄다는 말도 관심종자라는 말도 없었다. 때문에 제대로 꽂히는 말은 없었지만 애들이 나 하나를 싫어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는데 미움받아서 화가 났다. 또 뭐에 화가 났을까. 엄마가 칭찬을 잘 안 해줘서 화가 났다. 칭찬받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동생만큼은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우울한 아이는 사랑스럽지 않으니까, 우울한 나를 낳은 엄마에게 화가 났다. 최근에는 뭐에 화가 났나. 끝까지 자기 잘못을 모르던 너에게 화가 났다. 글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도 나만큼이나 나를 피하고 싶겠지. 아마 평생 만나지 않는 편이 너에게 더 좋을 거다.
나도 누군가에겐 생각만해도 화가나는 사람일 거다, 그래도 나는 내 손톱의 가시가 더 아파서 너한테 분노하는 것으로 내 모든 잘못을 돌린다.
적어도 너만큼은 내가 화내는 데 아무 소리도 못할 걸 아니까. 네가 내게 무어라 반박하고 싶다면 차라리 내 목을 조르겠지. 싸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그런거다. 아예 피하거나 성대를 도려내거나. 손가락 하나로 댐 붕괴를 막은 위대한 소년을 본 따, 대화의 물꼬를 온몸으로 막아야한다. 싸울 수 없는 상대니까,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라도 하나 세워놓는 게 편하다. 할 말이 많은 나도 딱히 너를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이상하다. 나는 분명 할 말이 많은데, 적어도 너를 빈사직전까지 만들 수는 있을 거야. 그래도 말하고 싶지 않다. 너무 피곤하니까. 사람들은 쉽게 화는 풀어야 사라진다고, 어디든 표현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게 정말 독한 분노를 품어본 적 없는 사람이 쉽게 뱉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궁금해서 정말 다 말해봤다. 돈을 받고 화를 들어주는 사람도 금세 지친 기색으로 나가떨어졌고, 돈을 준 나도 그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있으니까, 너무 고통스러웠다. 분노는 분명 전염된다. 나는 그걸 돈을 주고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더이상 싸울 수 없다.
말로 싸운다는 건 사실 너를 감화시키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감화될만한 인간이 아니잖아 너는. 그러니까 굳이 말로 싸움판을 벌인다는 건 재미본위로 찾아온 구경꾼들에게 저새끼좀 보라고 하는 짓이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났는데, 저 치때문이라 몰아가며 물어뜯을 거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막 내 속에 품은 독한 망상들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지, 네가 얼마나 저열한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한다. 그러면 너는 질 수 있다. 내가 이기는 건 어렵지만, 너만은 질 수 있다. 그래서 속죄를 했든 뭐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든지 해서, 너는 쉴 수 있다. 내게 남는 건 무엇일까. 내 연기는 끝날 수가 없다. 불쌍한 나는 계속 불쌍해야 한다. 한시라도 행복하다면 이제 네가 불쌍한 역을 뺏으니, 나는 불행해야 한다.
그러니까 분노는 강한 사람이 하는 거다.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고, 연기를 때려친 뒤에 통쾌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다. 연기였다 조롱할 시선따위 신경쓰지 않을 사람들이 하는 거다. 뒤를 돌아보지 않을 사람들이 해야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오랜 세월동안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들의 분노가 그들의 에고가, 나는 두렵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분명 제대로 화내본 적 없는 사람일거다. 운이 좋아 적당히 어, 어만 하고 휩쓸리며 사는 사람들일테다.
어, 어만 해서는 지금을 살 수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분명 지난 시간 후의 어느 고요일텐데, 그런 건 찾아오지 않는다. 몇 십년 동안 분노한 사람에게는 분노가 관성이다. 당신은 관성대로 피하기만 할 뿐 정면으로 맞설 능력은 없을테니, 계속 쫓고 쫓기는 일만 벌어질테다. 당신은 곧 죽겠지만, 신이 있다면 내세까지 당신은 쫓기는 일만 계속할테지. 속죄따위는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결국 너만큼 아플 수 없을테다.
5월 18일을 지내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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