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피 냄새가 난다
트리프롤리딘은 중추신경계로 곧장 달려가 내 몸을 어느 지하에 처박는다. 매해 돌아오는 초여름은 더위나 그즈음 흩뿌리는 꽃가루들 따위로 비염인의 삶을 사정없이 흔들고, 내게는 트리프롤리딘을 품은 비염 약 엑티리딘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더우니 숨통이 막히고, 꽃가루가 휘날리니 알러지는 당연히 일어난다. 이것은 내가 정해놓은 일이 아니다. 이런 지당한 자연의 법칙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것은 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자연이 내게 그러한 것처럼, 내게 매달려있는 콧망울을 곧 망가뜨릴 것 마냥 이리저리 비틀곤 한다. 차라리 코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연히’ 비염이 떨어지는 상황은 나로선 바랄 수 없다.
엑티리딘의 부작용을 찾아보는 이유는, 내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이상 그가 내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없을까 두려워 해서에 가깝다. 이 고약한 약을 먹으면 물속에 있어도 숨을 쉴 수 있었던 태아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겹겹이 쌓인 살들을 중력의 품으로 회귀시키는 자연의 법칙은 미미해지고, 고작 저 하얀 알갱이하나가 60키로가 넘는 내 몸을 사뿐히 들어올린다. 약을 먹은 나는 지하수에서 표류하는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아주 만약에, 우리 집에 돈이 많았다면 엑티리딘이 만든 나른함은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초여름 마루 위의 싱그러움에 비견됐겠지. 하지만 시골 반지하에 사는 나는 그런 사치스러운 선선함보다 언젠가 모래장난을 치다 깊숙이 삽질을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어쩌면 어른들도 그러는 것처럼, 어린아이였던 나는 소득 없는 경쟁에 목을 맸다.
그 시절 내게는 괄괄한 여자아이라는 수식어가 있었고, 나는 내 나름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내 반만한 남자아이들을 이기려 애를 썼다. 모래사장을 누구보다 깊게 파는 것도 내 수식어에 대한 충실한 이행 중 하나였다. 허옇게 색이 바랬던 모래는 깊게 파고들수록 아기가 오줌을 지린 것마냥 축축한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모래를 축축하게 만든 것을 ‘지하수’라고 불렀다. 과학적으로 ‘이게 왜 지하수냐’ 따져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애당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우리끼리의 세계에서 그건 분명 지하수였다. 모래에서 그 지하수를 짜내서 모아놓은 웅덩이는 선선하면서도 어쩐지 온기를 품고 있을 것 같았다. 모래가 그러하니까.
약을 먹은 나는, 그 지하수 한 가운데 처박혀 나른한 숨을 내뱉고 있다. 어린 시절 냉탕에서 잠수를 하다보면 물이 밀어내서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아가미가 없는 나는 오래 숨을 참을 수 없었다. 물이 밀어내는 것보다도 빨리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삶에의 고통스러운 갈망이 나를 물에서 밀어냈다. 그건 숨을 쉬며 살아야한다는 증명이었고, 나는 그게 싫었다. 삶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뻑적지근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염 때문에 미친 듯이 간질거리는 콧속이라든지, 앉을 때마다 허리춤을 밀어내는 뱃살이라든지, 애매하게 눈을 찌르는 앞머리라든지, 조금만 씻지 않으면 금세 피부를 텁텁하게 만드는 개기름이라든지... 그런 불가피한 생에의 흔적이 살아있는 나를 감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할 수만 있다면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감각은, 내가 그를 싫어할 수 있는 살아있는 동안엔 불가분한 것이라, 맥없이 그를 품고 살아갈 수밖에.
이 너저분한 감각들에서 잠시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불가분의 사실을 마주해야하는 순간, 예를 들어 직접 몸을 움직여 뱃살을 뺀다든지, 주기적으로 미용실을 방문한다든지, 하루에 세 번 정도 세안을 한다든지... 그런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감각을 직시하는 순간들이 아니라, 흐트러진 감각 속에 부유하는 나를 건져주는 파편들을 원한다. 비염 약을 먹는 것도 그런 소모적인 사랑의 파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약만 먹으면 한 나절정도는 삶에의 감각에서 나 자신을 괴리시킬 수 있다. 감각이 절단된다는 게 얼마나 큰 해방인지! 쏟아지는 잠만 조금 참아내면 무해한 꿈을 꾸는 것처럼 하루를 살 수 있다. 돈 벼락을 맞는 꿈같은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벌어지는 일들에 거리감을 되찾은 나는, 그토록 원했던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무 에게도, 아무 사건에도 힘을 기울이지 않아 누군가의 신경을 거스를 일도 없고 그래서 누군가의 삶의 감각을 일깨우지도 않는, 돌맹이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넘어뜨리는 돌부리가 아니라 이리저리 채이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돌맹이가 될 수 있다. 방랑하는 돌맹이는 감각이 없다. 감각이 없으므로 발로 세게 차여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 중심이 없는 돌맹이는 누군가를 쓰러뜨리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돌맹이로 사는 것은 나나 다른 이에게나 안온한 삶이다.
그래도 살아있기에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인간의 존재는 대개 다른 인간의 존재와의 접촉으로 증명된다. 인간이 개와의 접촉에서 스스로 인간다움을 느끼는 일은 없다. 한 인간의 안티테제는 결코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개 같은 놈은 실제로 개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간적인 부정을 행한다. 우리는 악덕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 우리의 반대 항으로 짐승을 끌어들였지만, 짐승은 절대 인간이 창조한 악을 표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변증되는 자아를 기꺼워하지 못한다. 그의 악함과, 그의 찌질함과, 그의 한심한 모습들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우리와 맞닿아 있는 그가, 완전히 붕괴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건 자신이 찢어발겨지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에... 그래서 한 번 해체된 자에게 같은 인간은, 자신의 온전한 자아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숨이 붙어있는 이상 정상 구실을 하기 위해 인간과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오늘 나는 글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조각보를 들고 대학의 교수에게 논문이랍시고 보여주러 가야 한다. 정상이기 위하여. 읽지 않는 교수에게 이메일을 몇 번이고 보내 그의 비싼 시간을 얻게 된 나는 우리 둘 중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순간을 치러내야 한다. 삶에의 감각은 이렇게 값비싸고, 작위적인 것이다. 비염 약 때문에 나른함이 넘실대지만, 이 불편하고 값나가는 시간은 어떻게든 졸음을 이겨낼 만한 부담감을 준다. 그럼 이제 늘 입던 추리닝을 벗고, 분까지는 바르지 않아도 ‘내 나름 꾸몄다’ 정도는 주장할 수 있게, 인간 구실하는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아니면 우리 늙은 교수가 또 얼마나 사제 간의 예의에 대한 말을 읊어댈까. 묘하게 각을 차리고 나니 살갗처럼 굴던 추리닝의 부스러기들이 바닥을 헤집고 있다. ‘언젠간 치우겠거니’하고 평생 치우지 않을 탈피의 흔적을 남겨놓고 문을 나선다.
“은영 양은 이 논문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네, 초록에 언급한대로 국가적 위급상황에서 모색할 수 있는 소수자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교수의 진부한 질문에,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으셨군요 그런 건 논문 맨 앞에 나오는데요’, 라는 속마음을 실었다. 감히 학부생 따위가 교수한테 꼽을 주다니, 이대로 졸업이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뱉은 말 뒤에 움츠린 몸이 뒤따른다. 교수는 여전히 내 말이나 글이나, 둘 중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지 제 할 말을 이어간다.
“은영 양의 글에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보이지가 않아. 사회과학의 기초가 뭔지 아나? 스스로 관심이 가는 사회 현상을 주제로 잡는 거야. 내 수업 들었다면 귀에 박히도록 들었을텐데, 은영 양이 내 수업을 언제 들었지?”
“3학년 2학기에 들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았구만, 벌써 수업을 다 까먹었나?”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제가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뭐 구성자체는 나쁘지 않아, 다만 너무 헐겁다고 해야 하나. 틀만 있고 연구는 대강 치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구만”
날림으로 읽은 교수가 날림이라 말할 정도면, 논문을 얼마나 날려 쓴 건지. 이런 건 주마간산도 아니야, 내 몸은 가만히 둔 채 말만 어디 멀리 야산으로 야유회를 보낸 게 아닌가. 약 기운 덕에 다행히 얼굴이 벌개지진 않았지만 수치의 감각은 단전부터 올라온다. 약이 짓누른 몸이 달아오르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이 곳을 떠야 한다. 마침 교수도 날림인 논문 따위는 더 이상 읽기 싫었는지, 그만 가보라 눈짓한다. 졸업이 요원해진다.
초여름의 날, 결국 졸업 학년이 될 때까지 운전면허를 따지 못한 나는 부질없이 이 먼 산길을 두 발로 올라야한다. 오히려 위로가 된다. 내가 지금 우울한 이유는, 논문 때문만은 아니다. 어찌할 도리 없는 신체의 고단함 때문도 있다. 때마침 아파트 한 단지에선 풀을 자르고 있다. 항상 느끼지만, 풀은 죽을 때 풀의 피 냄새를 뿜는다. 풀의 피 냄새는 절묘하게 잔디 깎는 기계의 소음과 어우러진다. 기계의 소리는 어쩐지 가해자의 고함이 아니라, 풀이 목이 꺾이며 내는 비명 같다.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풀은 기계의 소음을 빌려 마지막 단말마를 꽂아댄다. 매캐하게 기계의 탄내가 나지만, 풀이 찢겨지며 폐부에 쏘아대는 씁쓸한 향에 비할 바는 아니다. 풀은 아무렇게나 있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가. 날이 더워 풀의 냄새가 삽시간에 퍼졌다. 분명 트여있는 공간인데도 풀의 시체 냄새가 공백을 메우니 삽시간에 하나의 밀실처럼 내 숨통을 조여 온다.
초록은 생을 감각할 때 분명 온건한 색은 아니다. 풀이 찢어지면서 보여주는 푸른 속살은 어떤 색보다도 자극적이다. 빨강, 빨강은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빨강은 오히려 내가 찔릴 때 나는 색이 아닌가. 빨강은 해쳐질 때 내는 색이다. 그에 반해 저 초록은 지금 그 무엇보다도 나를 해하고 있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던 생명이 생의 감각을 발산하는 장면은 지금 나에게 너무나도 해롭다. 언젠가 모래사장에서 발견했던 소주병 조각들이 떠오른다. 전 날에 양아치 고등학생 무리가 거하게 술판을 벌인 흔적이었을 것이다. 낮이 돌아왔고, 놀이터를 점유한 아이에게 소주병 조각은 술이 담기는 원래의 용도를 잃었다. 소주병의 파편들은 어떤 기능과는 관계없이, 조각 그 자체로 사랑받았다. 역시 한 번의 생이 끝난 후에야 그는 주인공이 됐나. 그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각은 조각 자체로 빛이 날 수 있는가. 마구잡이로 짓밟혔던 풀이 그랬던 것처럼.
연달아 소주병 조각이 날을 세워 손가락을 벤 뒤 뿜어져 나온 피가 호명된다. 초록빛의 파편에 묻은 피는 검은 이슬이 됐다. ‘우는 건 어른답지 못하다’는 누구보다 어린 마음에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고 딱 오늘처럼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집을 향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보다 강한 것을 어여뻐했고, 조각들은 스스로 원하지 않은 사랑을 매서운 날로 밀어냈다. 그들은 타자에 의해 형태를 잃고 또다시 타자에 의해 무언가로 주조되는 것을 원했을까. 매끈한 곡선이 찢어지며 가해할 힘을 얻은 그들은, 그들이 당했던 일을 내 어린 살결에 반복했을 뿐이다. 맺힌 피를 담은 소주병 조각들은 마땅히 그래야 됐던 것처럼, 액체를 담는 원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나 역시 어디에 달려있는지 관심도 없었던 새끼손가락이 피를 흘리고 나서야, 그를 꼭 부여잡고 그가 내 몸의 말단에 존재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나 조각에게나 생의 감각은 이렇게 파괴적인 것이다.
때문에 피 냄새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피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피 냄새가 익숙해지려면 숱한 생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연쇄 살인마나, 의사처럼. 내 사주엔 칼이 없으니 아마 나는 생과는 영영 어색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제발 그래주길. 웃기지만 살아있다는 걸 느낄 때 가장 강력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내게는 버거운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논문을 제대로 보게 된 오늘처럼, 제대로 직시한다는 건 이렇게 고단한 일이다. 대충 뿌얘진 시야로 손에 집히는 것만을 잡으며 살고 싶은데, 원하는 게 저만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고, 이어서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는 게 싫다. 나는 지독한 근시를 원한다. 누군가 굴리면 굴리는대로 굴러가는 돌맹이의 삶을 염원한다.
잘 정돈된 산 밑의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고, 외제차 몇 대가 주차된 산허리의 단독주택을 지나고 나면, 산이 쏟아질 것처럼 깎아진 곳에 내 집이 있다. 구를대로 굴러서 다듬어진 조경용 자갈과는 다르게 내 집 주변엔 온통 주먹만한 모난 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문득 제초작업이 한참이던 아파트 단지의 조경용 자갈들을 생각하곤 겉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고작 돌맹이가, 고작 돌맹이인데, 값이 있는 곳에서만 아름다운가. 모난 돌 두 개를 집어들고 사정없이 서로를 내리친다. 돌들은 몇 번 자기네끼리 부딪히다가, 여러 번 내 손을 빻고 하릴없이 부스러기를 흘린다. 손에선 여지없이 핏방울이 맺힌다. 해는 7시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아, 달궈진 몸에선 땀이 내린다. 나는 한참을 돌을 쥐고 있다, 힘이 풀려 떨군다. 그리곤 참았던 숨을 들이쉰다. 피 냄새가 난다.
부스러기들을 손금에 모아, 흡입할 정도로 깊게 냄새를 맡는다. 이건 나의 피 냄새가 아니다. 돌이 내는 피다. 돌은 피 냄새가 난다. 돌마저 피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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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학기 중에는 역시 제 글에는 소홀하게 되네요... 시험이나 과제따위로 바빴습니다.
늘 학기말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이번엔 좀 열심히 산 것 같은데도 더 잘 해볼걸... 후회가 남습니다.
글도 더 열심히 쓸 걸 그랬나봐요.
앞으론 꾸준히 써볼게요, 다들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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