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목 다 늘어난 티셔츠만 입더라”
“왜? 마음에 안 들어? 바꿔 입을까?”
“됐어 귀찮게 뭐하러”
은호는 내가 말하는 건 다 들어주는 헐렁한 애였다. 그와의 연애는 시시껄렁한 잡담, 적당히 맞아들어갔던 타이밍, 의무적으로 갖는 주 2회의 만남… 이런 시시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는 아주 희미한 사람이었다. 만난 지 백 일이 넘도록 내 무엇 하나도 그에게 붙어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잔여물이 없는 깔끔한 사람, 끝 맛이 하나도 남지 않는 밍숭한 사람 그를 생각할 때면 구질구질한 당위를 따지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부러 좋은 말을 생각하다가 숨겨놓은 나쁜 말을 꺼내두곤 한다. 음악을 한다는 그가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는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순간에 흩어지는 음계랑 그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거 비싼 거야?”
“딱히”
“그냥 좋아하는 건가”
“옛날엔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래”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음… 목 늘어난 때부터”
은호는 살이 비칠 정도로 얇은 티셔츠를 선호했다. 목도 웬만하면 가슴께까지 늘어난 걸 좋아했다. 은호는 너무 말라서, 목이 많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을 때면 얇은 피부를 뚫고 나온 가슴뼈같은게 살짝씩 보였다. 칼바람이 부는 날에도 그는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안에 입고 대충 걸친 야상을 풀어 헤친 채 한참을 걸었다. 하얀 피부가 벌개졌었는데, 은호랑 있을 때 그렇게 많이 웃은 건 그날이 거의 유일했다.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는 그가 웃겼다.
은호랑 있을 때는 딱히 할 말도, 할 것도 없어서 나는 한참 은호의 허벅지에 손톱으로 빨간 선을 그렸다가 차츰 연해지는 걸 지켜봤다. 어쩌면 그게 나와 은호 연애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가끔 은호가 내 옆에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손톱으로 툭툭 그를 건드렸다. 손톱이 깊게 그의 피부로 움푹 들어갔다가 나오면 빨간 선이 생겼다. 그럼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있긴 있구나, 싶었던 거였다. 그래도 은호는 잠자코 있어서 가끔은 그 빨간 선이 절취선 같아서, 뜯어보면 진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은호처럼 은호의 음악도 희미한 선을 그렸다가, 사라졌다.
은호 집은 딱히 유복하지 않아서 은호는 꽤 이른 나이에 제 주머니를 챙겼다. 돈 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다 해보는 것 같았다. 공모전도 나가고, 외주도 받고… 답지 않게 성실했다. 대신 돈이 안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 돈 안 되는 제안이 올 때면 심드렁하게 네, 네 하면서도 제 주장은 똑바로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이 좋게도 난 은호랑 사귈 수 있어서 그의 하드에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허락을 받지 않고 틀어본 거라 처음엔 은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때 그가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보다 실망한 게 더 컸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타자였다.
뭐 어쨌든 그때 들은 은호의 음악은 대체로 현악기로 진행됐다. 현이 한번 쑥 쓸렸다가 한참 뒤에 옆의 현이 쓸리는… 밍숭맹숭한 곡들. 높은 음이 나올 때면 불쾌해지기까지 했다.
“난해하네”
그래, 이런 말까지 하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가”
은호는 긴 손가락으로 마우스 패드를 톡톡 치다가 노트북을 닫았다.
은호와 만난 지 2년째 되는 날이었다.
기념일을 잊어서 예약한 레스토랑을 가기 전에 길가에서 머플러를 사들고 갔다. 은호는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은호에게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사귀게 된 것도 어찌보면 내가 노력해서 된 거니까…
나랑 은호는 지역 게임 공모전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은호는 이미 페이를 받으며 음악감독 멘토로 활동하고 있었고, 나는 그냥 그 많은 공모전 기획안 중에 하나를 작성했었다. 취직하려면 뭐라도 해야지 싶었거든. 은호의 밝은 갈색 곱슬머리가 눈에 들어왔고, 비슷한 나이에 벌써 취직 비슷한 걸 하니 더 대단해보였다. 공모전이 끝난 뒤에 친구들끼리 술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은호도 멘토팀과 같은 술집에 왔다. 내가 먼저 연락해달라고 했고, 은호는 한참 뒤에 sns로 연락했다. 왜 번호를 아는데 굳이 dm을 보낸 걸까. 뭐 은호의 미스테리는 한 두개가 아니라 그건 궁금한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우리 둘은 이런 적당한 타이밍과 진부한 연애감정으로 만났다. 대단한 운명도 아니었고…
머플러를 사느라 한참 늦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은호는 너무 추웠던 건지 웬일로 쇄골이 살짝 보일법한, 목이 늘어나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왔다. 외주 첫 미팅이 잡히면 입던 옷이었다.
“미안해, 차가 막혀서“
거짓말이었다. 난 기념일을 잊은 걸 티 내지 않으려 그날따라 원활했던 교통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핑계는 웬만하면 누구나 간파했다. 하지만 은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랬구나“
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나란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의자에 앉고, 손을 닦고…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찬찬히 따라불렀다.
High hoops의 Can I Get Love. 이 노래는 아마 평생 못 잊을 거다. 은호가 흥얼거리는 가사는 미국 노래답게 외설적이었다. 맨날 똑같은 섹스얘기. 근데 자꾸 걔가 can I get love 같은 걸 읊조리니까… 갑자기 이게 다 너무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구걸은 은호랑 어울리지 않았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은호는 꼭 이태리 레스토랑에 오면 리조또를 시켰다. 예술하는 애라서 자기 취향이 확실한가 싶었다. 아냐 아마 씹는 게 귀찮아서 그랬던 걸꺼다. 은호한테 머플러를 건넸다. 은호는 물끄럼이 보다가 고맙다며 씩 웃었다. 입꼬리랑 턱이 같이 올라왔다. ‘흐음?’ 하는 표정으로. 왜 이걸 사왔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은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파슬리가 뿌려진 부분을 걷어내고 리조또를 다 먹어갈 때쯤에 나는 마구 울었다. 은호는 망가지는 일 없던 매끈한 표정을 잠깐 무너뜨리고 왜 그러냐 물었다. 나는 헤어지자 했고, 은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러자고 했다. 지루한 연애의 끝이었다.
은호한테는 궁금한 게 산더미같은데, 다시 만나면 조목조목 따져묻고 싶은데, 정작 사귀고 있을 땐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게 권력같았다. 사랑해달라고 조를까봐 입술만 벙긋댔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도 할 말은 없겠지.
순간이면 사라질 음처럼, 은호와의 기억은 연속되는 리듬없이는 떠올리기 어렵다. 그냥 가끔, 헐거운 무언가를 보면 페달을 밟은 것처럼 지루한 연애사가 진동을 일으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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