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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가

왜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가 <5>

 

한참 내 인생이 제일 구져보이고 실제로도 후졌던 중학생 때, 나는 처음으로 상담을 받아봤다. 자기연민 조지게 온 상태로 내 인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고나자 상담선생님이 벙찐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얼마나 큰 사람이 되려고 그랬겠어요'라는 말을 남기셨다. 우습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말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 한마디가 내 몸이 밑바닥에 떨어져도 완전히 아작나진 않도록, 충격파를 덜어줄 물웅덩이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대단하고 큰 사람이 되는 걸 열렬히 소망하진 않는다. 되면 좋겠지만 안 돼도 뭐... 어떻게든 숨 붙어있고 살고 있으면 그걸로도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 말이 왜이렇게 와닿냐면, 거지같은 일을 당해도 그 다음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엿같다고 해서 꼭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어떻게 이겨내면 다음의 내가 이 경험을 양분삼아 어떻게 버텨볼 도량을 짜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크게 도움되지 않더라도 남의 형편없는 조언보다야 낫다. 저번에도 숨 넘어갈 듯 엿같았는데 버텼다면, 당신은 지금도 분명히 버텨볼만한 재간의 싹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조그마한 싹을 부둥켜 안고 그 줄기를 뒤엉키게 두면서, 나를 버텨낼 안전망을 짜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난 저 말을 들은 이후에도 참담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 때 고민이 아주 우스워질정도로 많이. 그렇다고 그 때 했던 친구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성적에 대한 고민이 작았나? 절대 아니다. 매일매일이 죽으려고 하는 나와의 사투였다. 그래도 어떻게 운 좋게 살아남았다. 지금 내가 대단한 사람이 돼서 더 큰 일생일대의 역경과 난관을 잘 헤쳐나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난 여전히 서툴고 어리석지만, 다만, 그냥 흘려보낼 틈을 마련해 둘 정도로 커지긴 했다. 중학교 때보다 더 큰 파도가 들이닥쳐도 어떻게 조정간을 부여잡고 내 인생의 배가 난파당하지 않게 애를 쓰고 있다.

정리하자면,

어렸을 땐 "어 망했다!!!! 어떡해 어떡해" 였다면
지금은 "응 좆됐군"으로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



어쩌면 큰다는 건 서투름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릇이 커진다는 건 남의 실수가 아닌 내 실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 우리 자신과 조우하며 살아간다. 내가 정말 우울했을 때 꼭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나랑 같이 있는 외로움이라는 게 불쌍하다. 나같은 새끼랑 있어야 하니까' 외로움이라는 녀석이 나따위랑 함께 있어준다니. 말도 안 될 정도로 내 자신이 싫었던 거다. 이런 정서적 고통이라는 건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 처럼, 억지로 나의 현실 자아를 좁디좁은 이상향의 자아에 끼워 맞출 때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담 선생님이 말하신대로, 나의 그 숱한 엿같은 경험들은 나의 이상향 바운더리가 커지는 데 일조했다. 이상향의 나는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비대해진 몸뚱이를 들이대며 지금의 나와 적당한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적당히 마음에 든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어쩌고 저쩌고 나는 신적인 것에 뿌리잡고 있다'

어려운 말인데 난 이 문장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보다 거대한 운명에 의해 선택된 자라는 생각을 갖는 게 훨씬 더 안심된다고 믿게 됐다. 아무개가 노력해서 성공한다는 스토리보다야, 운명에 의해 선택된 '내'가 난관을 헤쳐내 결국 승리하리라. (갑자기 비지엠 올림픽) 이런 쪽이 더 드라마틱하고 멋있지 않나. 그리고 남탓하기도 쉽다. 실패했다고 꼭 당신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누가 난관을 줘서 이렇구나. 내가 더 커지려고 이런 일이 생긴 거구나... 내 노력대로 인생이 흘러가면 인생의 풍파도 다 나때문 아닌가? 난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정신건강을 위해선 적당히(강조하는데 적당히) 남탓할 필요가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건 니체가 말한 문장이다. 음 너무 니체스러워. 어쩌면 이 카테고리를 관통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이 문장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은게, 너무 무섭잖어. 어떤 고통은 사람을 영영 불구로 만들 수도 있다. 고통으로 인해 더 약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지금 뭐 죽도록 뛰어서 도망치든, 맞서 싸우든 간에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그 전보다는 분명 더 넓은 시야로 지금의 고통을 마주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지금보다야 낫다.

난 더 자라있을 내가 기대된다. 지금의 고통을 비웃어줄만한 내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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