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에 수강한 <예술과 사회> 기말 레포트입니다. 나름 점수를 잘 받았는데, 제가 다시 볼 용도로 티스토리에 업로드해요. 제 블로그를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다 알만한 작품들이 나옵니다.
그럼 가볼까요? 후비고~
교수님의 입은 싱크가 맞지 않았어요
유년기의 끝자락을 추억하면 꼭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떠오른다. 어린 여자아이를 양육하는 pc게임이었는데 나는 늘 캐릭터를 두 개로 만들어서 엔딩을 봤다. 하나는 치트를 써서 게임의 진엔딩이라는 퀸을 만들 고야 말았고 나머지 하나는 딱 죽지만 않게 내키는 대로 키웠다. 그쪽의 엔딩은 항상 능력치가 많이 요구되지 않는 아르바이트생이나 3류 모델이 되곤 했다. 철저히 대상화된 상태로 '내 딸'은 그려졌고, 게임 내에선 아무렇게나 굴러도 상관없는 하류직종들이 판치고 있었다. 양육과정에서 내가 마음을 놓으면 딸은 꼭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을 갖고야 말았다. 그래도 나는 한 편에는 공략대로 퀸이 될 수 있는 딸을 키우면서도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딸을 보며 숨통이 트였다. <프린세스 메이커>는 내가 전교 1등을 한 다음에 받았던 선물이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받고나서 하루에 15시간은 거뜬하게 게임만 했다. 성적은 쭉 하락했고 나는 언젠가 엄마한테 크게 혼이 난 뒤에 게임을 접었다. 사실 내가 더 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건 게임 속의 내 딸이면 충분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퀸이 됐던 딸보다 내키는 대로 키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딸이 더 기억난다. 예전에 엄마나 친구나 선생님이 칼처럼 들이민 평가 때문에 인정욕구에 목매게 됐다고 나의 유년기를 설명했지만, 냉정을 되찾고 보니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고작해야 게임 속 데이터에 몰입해선, 나는 감히 살 수없는 방식으로 해방된 캐릭터에 이입했다. 내가 고작 그런 방식으로 숨을 쉰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예술과 사회 수업을 들으며 교수님이 반복적으로 읊은 자기연민 없이 쓰는 예술이나, 혹은 서울대생으로서의 인정욕구에 몰두한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는 계속 나를 불쌍히 여기는 글만 써왔다. 그게 내가 제일 잘 쓰는 글이라 생각해서였다. 모순적이지만 나는 또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불쌍히 여기는 것과 무시하는 것은 다르지만 닮아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날 무시하면서 가장 아픈 상처를 냈고 나는 또 그 경험을 상기하면서 상처를 헤집었다. 나에 ‘대한’ 글은 또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레퍼런스가 필요하지 않으니 쓸데없는 각주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말처럼 이번에는 나를 주어에 두고, 양미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까지의 나를 파괴해보고자 한다. 숱한 자기복제에서 벗어나, 수업의 힘을 빌어서 내가 가해했던 역사에 대해 기술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무시당하는 게 너무 싫어서 무시하는 습관을 들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젠 내 눈에도 길이 들어서 거울을 보다가 안광을 잃은 눈을 보곤 한다. 이 탁한 눈으로 나는 날 상처입힐만한 사람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나는 이렇게 방어적으로 무시하기 위해 남을 평가했고, 이 평가가 나의 가해의 근저에 있다. 때문에 가장 먼저 평가에 대해 쓰고자한다.
평가
<웨이스트 랜드>의 빅 무니즈가 추구한 목표는 모호하다. 그가 카타도르에게 가져다 준 것이 희망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빅 무니즈가 그들의 세계를 침범하고, 그들의 세계를 밑바닥이라고 감히 말하는 세계에 그들을 직접 데려가고, 약탈자의 잉여자산으로 작품을 경매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다큐를 도저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돈이 많은 누군가가 내게 저 높은 곳에서 지시하고 나는 그의 말대로 쓰레기를 두고, 내 인생을 전시한다면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때문에 역지사지의 마음에서 나는 화가 났다. 빅무니즈가 스스로의 평가를 떼어놓고 카타도르 그 자체의 의미를 찾아주고자 했다할지라도 그와 그라마초 간의 위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자본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만의 예술관이 있다. 그는 마치 카타도르와 함께하는 듯 하지만 그 시간은 그의 인생에 아주 잠시 일뿐이고 그는 다시 뉴욕의 비싼 작업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결코 그라마초에 영원히 거주하지 않는다. 혹자는 엔딩에서 변한 카타도르의 모습을 통해 빅 무니즈의 활동이 결코 의미 없는 희망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큐의 완결은 결코 카타도르의 인생에서 한 챕터의 엔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메라 렌즈에 담기지 않는 다층의 감정을 안고 이어지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빅 무니즈가 안겨준 희망은 여러 갈래로 나뉠 것이다. 카메라에 어떻게 담겨있든 간에.
빅 무니즈의 시선은 그라마초 그 자체를 인정할 것인가, 혹은 그라마초를 부정하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라고 할 것인가에서 딱히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변화했다고 느꼈다는 자체도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담은 조작된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전달됐을 뿐이다. 빅 무니즈는 도덕적 냉소를 통해서 정치인이 개입해서 해결하는 빈민의 문제를,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기존의 다큐의 위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기존의 예술을 비웃으며 배우지 않은 카타도르도 할 수 있는 예술을 주요한 예술 씬에 전시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카메라에 비친 상에 불과하며 관람객은 진실로 안전한 자리에서 몰입되는 ‘것 같은’ 감정만을 소비할 뿐이다. 빅 무니즈가 무릅쓴 위협 자체는 관람객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람객을 기만하는 것은 빅 무니즈의 대답하지 않은 시선보다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배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우리를 배제하고 또 우리가 그 안을 우리의 인생에서 배제시킨다. 상호 배제된 곳에서 객체로 그려진 카타도르는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루시 워커 역시 객관성의 허구를 인지하고 관찰자로서 개입하는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감독의 시선을 빌려 객체를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측은한 시선에서 빗겨나서 그들이 보다 주체적으로 쟁취하는 삶의 단면을 관찰하며 그 전의 자신을 붕괴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로튼 토마토의 높은 점수는 이 다큐멘터리가 담고 있는 시선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가 남겨놓았을 그라마초에 함께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웨이스트 랜드>에 등장한 카타도르들은 빅무니즈의 잔해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한다는 감각 역시 근대화의 기획으로, 미발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감각이 있다. 노클린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유무형의 강박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내심 빅무니즈에게 들었던 반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노클린 리얼리즘에서 등장하듯 우리는 끊임없이 대상의 의미를 착취하기 위해 애쓴다. 상징화된 십자가, 수태고지, 월계관 등 중세 기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 내포된 의미가 있기를, 또 그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기를 인간은 간절히 원한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예술은 유치원생이 그렸냐는 빈정을 듣는다. 현대의 추상화가들이 대중에게 받는 비난은 대개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빅 무니즈의 냉소처럼, 예술이 꼭 전문가가 창조한 의미를 품어야만 하는가라는 의심이 뒤따른다. 여기까지가 수업의 여운이 남았을 때의 생각이었고, 나는 관성적으로 현실에 돌아와 달려오는 고지서나 과제 따위를 보며 예술을 하지 않는 세계의 지표면에 발을 붙였다. 사회가 예술을 필요로 하듯이 예술도 구질구질한 사회의 단면을 껴안고 있다. 해방을 꿈꾸는 혹은 사회가 작위적으로 부여한 가치를 앗아간 예술 역시 아주 속세적인 삶의 단면이 없다면, 그러니까 인간이 없다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구색을 맞춰 살기위해 우리는 같은 인간만이 해줄 수 있는 평가와 인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오로지 살기 위하여. 누군가가 우리를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의 돈을 얻어갈 수 있다. 지디가 유명해서 똥을 싸도 박수받을 것이라는 평론가의 말처럼, 다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돈을 벌 것이고, 그래서 그는 아주 못 배운 사람이나 할법한 일들을 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발 딛은 나는 이런 인정을 아예 무시하고 살 순 없다고 단정한다. 때문에 빅 무니즈가 그라마초에서의 예술이 당장 돈 깨나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인정받는 예술은 허구에 가깝다’고 조롱하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면, 그 기저에 깔린 기만에 치가 떨렸다. 그의 참 뜻이 그들을 향한 조롱이 아니라 카타도르에게 향하는 계몽이라면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가 가져온 영향력은 카타도르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세계를 넓힌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온실에 앉아 떠벌리는 나보다 당연히 빅 무니즈가 카타도르의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책임도, 그들을 평가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빅 무니즈만큼은 그가 던져놓은 카타도르의 세계에 책임을 갖는다. 나는 나의 안온한 삶을 위해 애써 빈민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늘 그래왔듯이 무책임한 쓰레기 투기를 일삼을 것이다. 그러나 빅 무니즈만큼은 높은 곳에서 지시한 초상화의 객체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웨이스트 랜드>의 출연진엔 카타도르의 이름이 없다. 오로지 빅 무니즈의 이름만 담길 뿐이다. 따라서 로튼 토마토의 높은 평가도 사실상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에게 향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브레히트 식의 판 깨기가 아니라, 오로지 예술로만 할 수 있는 이세계의 몰입을 시도했다. 만약에 앞서 언급했던 조롱이나 계몽이 아니라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다른 의미를 탐구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노클린의 리얼리즘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했다. 글을 읽고, 의미를 탐색하고 평가하는, 예술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벗어던짐으로써 기성의 정식들,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지식을 비운 채 이 세계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느꼈다.
예술에 대해 unlearn했던 나는 비교적 이런 과정 자체는 손쉽게 달성했다. 나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20년간 살면서 또 4년은 대학에서 전공으로 배우면서 파렴치하게도 학부생 주제에 사회학도라는 이름을 달고 다녔다. 때문에 예술과 사회에서 사회가 얼마나 내게 중요했는지는 떼놓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술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사회보다는 쉽게 비울 수 있었다. 그 전의 예술을 모르고 노클린의 리얼리즘을 접하니 나도 쉽게 ‘기존의 관습과 도식, 없어도 좋을 법한 버팀목이지’라는 무책임한 말을 뱉을 수 있었다. 때문에 빅 무니즈의 예술이 그냥 허망한 것이라면, 어떤 의미도 없고 단지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 존재하는 양태로 그리고자 했다면 나는 이것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잔여감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업이 예술과 과학이나, 예술과 윤리라면 더 쉽게 작품을 받아들였을 텐데 <예술과 사회>라서, 나는 카타도르의 작품이라곤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빅 무니즈의 작품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클린이 드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덜 알려진, 희소한 이유로 관찰을 직접하고 현재에 몰두할 수 있는 소재를 골랐다고 언급했을 때에도 딱 이런 감정을 느꼈다. 드가는 무희를 그려 분명 소외된 자들을 작품 세계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넓혔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실제 세계에서 그는 무희를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착취하지 않았나. 아트티(Artsy) 줄리아 월코프는 아주 사회적인 칼럼 ‘드가의 발레댄서 이면에 숨은 추악한 진실’을 통해 드가가 어린 발레리나들에게 몇 시간 동안이나 뒤틀린 포즈를 취하게 하는 학대를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아주 타자의 시선에서 어린 무희들을 대상화시키고 있다. 드가의 그림은, 그러니까 그의 잘난 그림은 무희들을 다층적인 착취의 세계로 몰아넣은 것은 아닌가. 또 정말 주체가 자신을 그리는 예술은, 평가가 아닌 예술은, 때문에 독백이나 취미에 불과한 예술은 누구한테도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 허무함을 느꼈다. 드가가 자신을 그린 그림을 운 좋게 살롱에 들어간 무희가 보고, ‘나 역시 예술의 한 영역이 될 수 있구나’를 느끼고, 또 그것을 스스로 표현했다면 만약 정말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일어났다면 나는 그의 예술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내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는 것을 멈추고, 또 ‘그것이 알고 싶다’ 식의 오만한 판단을 멈추고 예술을 바라본다면 무희의 그림이 나에게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애초에 나를 위한 예술은 아니었으니, 나는 시야 밖에서 펼쳐질 씬들을 지우거나 막연하게 믿을 수도 있다. <웨이스트 랜드>를 보고 나는 볼 수 없는 곳에서라도 카타도르가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긍정하거나 혹은 자신의 세계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탈출했다면 나는 이 다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탈출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 한참을 맴돌았다. 내 밑바닥에선 여전히 그라마초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긍정하는 그들의 세계는 나로선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분명 거기서 역동적으로 살고 있다. 나는 또 빅 무니즈처럼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 그러나 감히 하루에도 몇 키로의 쓰레기를 배출할지 모르는 내가 안면 몰수하고 도망치라든지, 거기서 잘 살고 있으라든지의 말을 남길 수 있는가? 나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간의 몰입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나 사회가 멋대로 객체로 처박아 놓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자기 연민 같은 시시한 방식이 아니라 자의식을 온전히 옮겨놓고자 하는 불가능의 시도가 이 다큐멘터리의 모호한 부분을 해소시킬 수 있다. 나는 또 나대로의 삶을 살겠지만 적어도 나의 삶, 어느 정도의 희망과 막막함이 혼돈된 집합체가 카타도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 수 있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서 북극곰이나 펭귄을 구하지 못하듯이, 쓰레기를 줍는 카타도르를 위해서 쓰레기를 더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 왜곡된 자의식을 해체하고 내가 그렇게 카타도르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나 빅 무니즈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해서 좋다고 평가할 수는 없고, 그냥 내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들을 배치시켜주어 모르던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무던한 감각을 남길 수 있다.
속세
카타도르를 보며 나는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껏 그렇게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일이 없다. 나는 소위 힙스터스러운 옷을 구매하기 위해 서울 역까지 갔는데, 그 주위에는 온갖 부랑자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고작해야 용인이나 관악 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제야 진짜 서울을 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어선 안 될 곳에서 진을 치고 뙤약볕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한 명은 여자였는데, 속옷이 들춰진 상태로 잠을 자고 있었고 그런 사람은 거기 수도 없었는데 또 여자라는 이유로 더 시선을 받고 있었다. 나머지 노숙자들은 마치 표지판처럼, 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잊을 수 없다. 누군가 ‘돈이 없으면 뭐 어때?’ 라고 머리에 꽃밭이 완연한 말을 한다면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서울역 한 가운데에 끌고 가고 싶다. 그는 또 ‘그러니 우리가 돈을 덜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누구에게나 통용되지 않을 말을 상대의 상황도 모르고 지껄이는 무례를 단단히 고쳐놓고 싶다. 나는 이처럼 속세의 것을 지키고 빼앗으며 살아왔다. 평가에 이은 나의 가해는 속세에의 갈망이다. 인정욕구가 지나친 나는 내 것을 항상 양보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돈이 있다면 베풀었다. 딱히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베풂을 받은 이가 나를 좋게 봐주길 원했다. 한번은 분식집에 어떤 거지가 찾아와 구걸을 하기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김밥과 라면을 시켰다. 그는 김밥 한 알을 먹더니 취향이 아니라며 떠나갔다. 아마 그냥 돈을 줬으면 더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푸는 데 꺼려졌다. 또 한 번은 정말 부자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결코 베풀지 않았으며 그 돈을 아껴 비싼 레스토랑이나 에스테틱을 한 번 더 갔다. 또 자신에게 투자한 결과들이 그에겐 다시 돈으로 돌아갔다. 협찬이나, 값비싼 걸 사주는 남자친구라는 형식으로. 나는 그 이후로 해소되지 않는 르상티망을 느낀다.
부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이는 부를 한 번이라도 가진 자다. 언어의 본질이 화자에 의해 호도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잔뜩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학벌주의 철폐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서울대생이고, 페미니즘을 무리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로 패싱되는 사람이다. 성공이라는 것은 자신의 무언가를 확장시킨다는 뜻이다. 자아를 끊임없이 불려서 결국 타자마저 자신의 것으로 감화시키는 자가 성공했다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다. 포기는 성공의 끝자락과 맞닿아 있어서, 타자와 접촉된 정도로 자아가 비대해진 자들의 포기는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는 조중균(<조중균의 세계> -김금희, 의 주인공)같은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정말 한갓된 곳에서 본인의 일을 한다. 그의 일은 그의 프라이드일 뿐 회사 사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란 씨가 그를 이해했다면 왜 나서서 조중균을 변호하지 않았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는 루셀의 작은 언어유희처럼 본인만의 규칙을 정해놓고 무의미한, 본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들을 반복한다. 조중균이나 루셀의 세계는 비좁고 깊다. 우리가 그나마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재능이 있는, 성공한 글쟁이의 글을 빌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재능 있는 글쟁이들의 세계에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킨 유일무이한 순간에서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접할 수 있다. 때문에 나에게 당장에 속세를 포기하라는 말은 예술가들의 앙탈처럼 들린다.
조중균같이 살고 싶은 자는 얼마든지 그의 세계에 갇혀서 살 수 있지만, 또 나나 그렇게 오지랖이 넓지 않은 누군가는 그의 인생을 존중해 줄 수 있지만 조중균의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사람은 오히려 그를 마구잡이로 무시하는 출판사의 상사나 단칸방을 내어주는 친구다. 우리는 아주 무책임한 위치에서 그를 존중할 수 있어도 정작 우리의 자본을 투여할 때,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는 정도로 우리의 것을 내어줄 때는 조중균에게 한없이 속물적인 사람이 된다. 출판사의 상사, 수치를 잊은 386세대는 자신에게 무가치할 정도로 돈이 많았다면 그 옹졸한 심보를 숨기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조중균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 한번이라도 무엇을 잡은 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천박하다, 예술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적어도 나보다야 자신을 만드는 예술을 한번이라도 성공했던 자이기 때문이다. 조중균같은 사람은 포기하라고 말하는, 속세에 발 딛고 사는 사람과 살을 맞추고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대체로 지척에 있는 것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느끼며 예술을 즐긴다. 예술은 카메라의 렌즈나, 캔버스나, 지면 등의 매체를 거치고 나왔을 때 즐길 수 있는 예술로 소비된다. <웨이스트 랜드>의 쓰레기가 예술로 비춰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 피사체는 우리를 해칠 수 없으니까. 죽지 않기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 양미자가 본인의 손자를 고발하듯이, 빅 무니즈가 냄새나는 그라마초로 들어가듯이 혹은 아녜스 바르다가 노신을 이끌고 쓰레기장을 전전하듯이 예술가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곳에 몸을 던진다. 푸코가 말하는 실존미학은 자기제작을 의미하는데, 이런 자기제작을 예술을 감각한 이가 즉 속세에서 한 번쯤은 굴렀던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자신을 파괴하는 단계가 선행돼야 한다. 근대화를 거친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은 예술들이 있다. 하지만 영화 <시>에서 정말로 시를 썼던 사람은 양미자밖에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 속에서 수많은 결절점을 감각한다. 이분화 시키고 자꾸 a와 b를 구분하는 습관은 정작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런 근대화의 유물을 정말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언어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자기의 진리’를 담은 예술을 다시 이름을 붙여 너는 다르다고 칭송할 수 있는 틈을 벌리고 싶다. 나는 이것이 아주 속세적인 방식으로 내가 경외하는 예술을 굳이 격리시키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계속 약자의 위치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자기 확장을 못한 채로 얇은 이미지를 떨고 있는 꼴이 보기 싫다. 약하기 때문에,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예술일지라도 그것이 모순적이지만 힘을 얻어서 그들을 타자의 위치에 몰아넣었던 주어들을 전복시키는 광경을 기대한다. 나는 이렇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는 예술을 사랑한다.
아마 수업에서 나온 예술가들의 초연한 태도를 이어받기 위해선 나 역시 나와 세계가 맞닿아 있는 자기 확장의 외연을 인식하고 또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보여서 나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걸맞은 지위를 얻는 것이 더 눈앞에 가까이 보인다. 이 상태의 내가 속세에 대한 갈망, 속세에 없는 자들에 대한 가해를 멈추기 위해선 그들의 삶에서 적절히 멀어져야 한다. 그들에게 나의 진리를 강제하고 구속하는 순간 나는 꼰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성공한 나의 역사를 뒤흔들 예술가들의 세계에 접촉해두고 싶다. 아주 영악한 방식으로 그들이 결국 이 확고한 진리체제, 지금의 세계를 뒤흔들 때쯤에는 그들의 곁에 서있고 싶다. 조금 잰체하며 말하면 성공했지만 교양도 있는 사람, 돈이 있지만 예술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가증스러운 말은 양심을 더럽힐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나는 무엇 하나 포기할 줄 모르는, 최초의 인간이나 고아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속물적인 인간에 불과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내가 예술을 한다면 나는 스스로에 대해 질문하고, 또 주권적인,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붕괴된 세계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매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 자신만의 진리를 들이미는 과도기에 슬며시 나의 덕을 본 조중균들을 또 나의 매체로 삼아서 크레딧에 내 이름이 붙는 작품을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관계
관계는 내가 나의 세계를 가해하는 주된 무기다. 나는 나를 가해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존재를 내 세계에 두면서 나를 가해했다. 속세를 놓을 수 없었던 나는 나를 평가할만한 것들을 끊임없이 주변에 배치하며 보다 진보된 나를 꿈꿨다. 예술가와 성공한 나 사이엔 내가 베푸는 동등함이 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동등한 위치에 놓인 사람과 한순간도 함께이지 않았다. 나보다 잘난 아이들의 무리에 섞여있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동경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나를 동등하게 봐주는 사람들은 시시했다. 수단이 된 관계는 나에게나 상대에게나 가해에 불과했고, 나의 관계는 언제나 빠르게 끝을 맺었다. 끝이 난 관계를 반추할 때면 물밀 듯이 한 박자 늦은 감정들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면 나는 또 새로운 관계로 감정을 지우기 위해 새로운 사람이나 사건이나 존재에 몰입했고, 그 몰입이 끝나면 또 하염없이 뒤늦은 감정들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가 담은 마네와 막시밀리안 황제의 관계는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관계다. 나는 상대의 존재방식을 어떤 당위도 두지 않은 채로 바라보고, 그는 그대로 나의 세계에 맞닿아서야 위용을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네가 막시밀리안 황제를 그렸지만 바뀐 것은 오히려 막시밀리안 황제였다. 그는 마네의 그림에 와서야 대단한 영웅이니 순교자니 이런 수식어들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망국의 허수아비 황제가 무슨 염치로 사후까지 순교자 행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가 마네에 이르러 자유로워졌음을 느낀다. 성공하고 싶고 발전하고 싶다는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관계를 열망하고 있고, 유기체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아주 의존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 나는 그런 기대를 멋대로 몇몇에게 덧씌우며 그들을 가해하고 있다.
나는 슈티르너나 니체같이 유일한 자로서의 자아를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을 무에 정초하는 모험을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다. 슈티르너는 ‘개인에서 독립한 어떤 객관적인 사회적 실재/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평범한 인간은 사실상 그런 무의미한 가치체계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종교나, 정치나, 신화를 믿지 않는 인간은 오로지 자아를 믿게 되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온전한 자아를 직시해야 한다는 한계를 딛고 나아가야 한다. 즉 자신의 결함들을 보고 느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유한한 창조자인 인간이 완전히 보완하거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이 강한 이유는 그것을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회적 당위성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개인주의는 따라서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극도의 자기만족을 의미하는 한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평가나 또 속세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계는 유일한 창조자인 자신에게, 자신보다는 차순위로 자리 잡게 된다. 내가 아니라 관계를 앞에 두어야 하는 속세에서의 성공이나 평가에 대한 피드백과는 다르게, 오로지 나에 대한 몰두는 관계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해체시킨다. 어딘가에 기대야만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나와는 다르게 용기 있는 예술가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게 자신을 연결시키는 의미 체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붕괴시켜버린다. 나는 짐짓 이것이 나의 건강한 정신상태를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체화하는 데는 어렵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의 거리두기는 나의 아주 예민한 투정을 무디게 만들었고, 나는 그 무뎌짐을 다른 무엇도 아닌 일평생 들어왔던 수업의 변화에서 목격했다. 나는 속세에 대한 열망이나 평가에 목맸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전형적인 서울대생이다. 내가 마주친 몇몇은 돈이 많거나 재능이 아주 훌륭해서 애를 쓰지 않아도 당연히 서울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운이 좋은 사람들은 소수였고 다수는 또 나름의 버티기로 이곳을 쟁취한 부류였다. 나 역시 과반에 속해 강박적으로 수업의 규범에 맞춰진 사람이었다. 수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선 아주 단순한 원칙을 지키면 그만이다. 시험을 출제하는 창조주 교수님의 말을 그대로 적고 인터넷에서 그럴듯한 논문을 찾아서 내 어설픈 의견을 덧붙이면 충분하다.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선 반복되지 않는 강의를 그대로 시험지에 재현하기 위해 일시적인 매체, 노트라든지 노트북이 라든지를 이용해 저장해 둬야 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채우고 나면 성적은 자동적으로 잘 받게 되어있다. 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루셀마냥 피토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타이핑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그런 원칙은 사실상 무용한 것이 되었다. 놓친 말들은 되감기를 하면 그만이었다. 교수님 몇몇은 아예 녹화강의를 올려두셨고, 라이브 방송을 선택한 교수님조차 어딘가 여지를 부여하는, 성적에 집착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나는 또 말 잘 듣는 서울대생으로서 타이핑을 멈췄다. 이건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평가의 기준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불합리를 배제한 것일 뿐이었지만, 해방된 신체로부터 나는 이상한 자유를 느꼈다.
화면으로 이루어지는 라이브 비대면 강의에서 학생 몇몇은 자신의 화면을 꺼서 거기에 존재하는 흔적 자체를 지우곤 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진공 속에서 이야기하는 그 감각을 싫어하셨지만 나는 철저히 학생의 입장에서, 또 위에서 서술한 얄팍한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반물질적인 형태의 수업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데면데면한 비대면 수업에서 평가나 성공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져서 키보드에서 손을 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a+를 받지 못하면 슬퍼할 것이다. 얌전한 객체로서의 내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성공에의 야망을 가릴 수 있다는 공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수업들이 나와는 먼 것처럼 느껴져서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시각을 되찾은 나는 지난 학기동안은 볼 수 없었던 교수님의 입을 볼 수 있었는데, 수업 내용이 아니라 거기 존재하는 교수님의 입에 대해 잠깐 생각할 수 있었다. 곰 인코더의 워터마크에 가려진 교수님의 입은 소리와 싱크가 맞지 않았다. 나는 양효실 교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교수님의 입과 소리의 관계에서 언제나 시차가 있었을 수도 있다. 비대면 강의는 내게 교수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강의를 제공하고 성적을 부여하는 대단히 권위적인 위치의 교수님은 우리 사회가 만든 연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연애는 정확히 이런 무의미한 사회 연극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연애를 잘 하고 싶다면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따위에서 ‘이럴 때 남자가 설렌다’, ‘애인이 심쿵하는 10가지 행동’ 등등의 컨텐츠를 보고, 정형화된 법칙성을 파악한 뒤에 그대로 그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연애는 매체가 꾸며놓은 일루전을 제대로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 모방을 모방한, 혹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의미체계를 또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은 인간에게 본질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은 그런 허울을 인지하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인물상에 과몰입하게 된다. 나는 그런 인간을 볼 때면 기이함을 느낀다. 대체로는 자아가 형성되지 못한 스물 무렵의 또래들이 그랬는데, 종종 본인의 권위에 취한 교수들도 그런 행동을 보여줬다. 아주 속세적인 사람, 혹은 평가에 천착한 사람들이었다. 본질보다 역할을 앞세우면 늘 문제가 생긴다. 내가 기이하게 느낀 사람들, 완벽한 학생에 취해있던 내 친구들이나, 무려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을 진 인물들, 심지어 여기서까지 평가를 놓지 못하는 나까지, 이 모든 사람들은 꼭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녔다. 그러나 화면을 맞대고 마주한 양효실 교수님과 나는 서로에 대해 어떤 의미 있는 소문도 만들 수 없다.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강의를 했고, 나는 교수님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기존의 교수와 학생의 역할은 화면 안에서 큰 의미가 없다. 맞춰지지 않는 평행한 시간대에서 교수와 학생은 ‘교수라면, 학생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기존의 의미체계를 갖출 이유가 없다. 나는 나대로 잠옷 바람으로 수업을 들었다. 화면을 맞댄 관계는 서로가 원래 지녀야 할 역할 부담을 덜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화면 속의 교수님이라는 반대 항에 기대 그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화면 너머의 진짜 교수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교수의 역할, 사회가 먼저 부여한 관계가 아니라 마주한 사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예술과 사회>가 무엇을 쌓는 수업이 아니라, 나의 아주 부실한 믿음을 부수는 수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업의 내용이 우리가 믿는 사회의,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타자의 예술을 설명했다는 것과 동시에, 묘하게 싱크가 맞지 않는 교수님이 아주 먼 곳에서 수업을 전하는 형식이 내게는 기존의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본질과 본질이 만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먼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나 이전의 세계가 마련해둔 표상과 기호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시킨다. 따라서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기존의 가치를 멀리 보는 수업의 주제와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거리가 멀어져도 마음만은 가까이 따위의 슬로건을 내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물리적’ 거리두기 이지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지 않나, 그들은 잘못된 표현을 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표어는 양효실 교수님의 <예술과 사회> 수업에 양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예술이 결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회에 지나치리만큼 얽매어서 그 핑계로 가해를 일삼는 내게 예술은 양심의 가책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얽매임을 달리보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나는 다시 선택을 하더라도 평가와 속세와 완전히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에서 만큼은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선택을 ‘종종’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펼쳐진 <예술과 사회>를 추억하며.
지금보니까 또 막 잘 쓰진 않았는데 교수님이 좋게 봐주셨다.
더 정진하여야겠다.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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