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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2021/단편소설 당선작]밸런스 게임
많은 일요일들을 지나왔다고 윤은 생각했다. 징검다리 같은 일요일들에는 아들과 그녀, 단둘뿐이었다. 심지어 택배기사도 찾아오지 않는 요일이라고 윤은 베란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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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스 게임>은 너무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의 전반적인 처지는 분위기는 작가님의 의도에 적합한 하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현실반영의 문학이라는 차원이 자꾸 뒤 돌아보게 만들고, 그렇다고 했을 때 <밸런스 게임>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받고 또 주고 있느냐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에서 <밸런스게임>이 명료한 한계에 부딪히고만 있다는 답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저는 읽기 습관상 글을 언어예술과 현실반영이라는 차원에서 나누게 됩니다.
언어예술의 차원에서 <밸런스게임>은 신춘문예에 어울리는 작품이었습니다.
‘여성의 가치 상실’(논란이 있겠지만 윤은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을 매분마다 감각하는 윤, 그에 대비되는 학생과 싱싱할 때 높은 값을 받는 청과 사이의 알레고리는 감질맛 나게 그려지면서 전달방식에 있어 세련미를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알처럼 엮어내는 윤의 서사가 마냥 직선적이지 않아도, 각각의 알이 구성차다는 느낌이라 흡입력을 갖춥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나오는 하강의 이미지는 꽤나 노골적이어서 ‘어? 이렇게까지?’라는 감상을 느끼게 했습니다. 굳이 그걸 적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하강하는 윤의 감정이 느껴졌는데, 결정타를 날리면서까지 윤의 침전하는 세계를 작가의 이미지로 구현하려는 시도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엔딩에서 이렇게 이미지, 주인공의 감상으로 끝나는 작품이 많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구태의연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계속 처지니까 힘든데 수면 아래로 빠져드는 것으로 맺어버리니 저 역시 갑갑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어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밸런스게임>의 세계는 대단히 완성도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현실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엔딩까지 너무 힘이 빠져버리니 실망이 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 한 방이 나올 때가 됐는데, 굳이 굳이 모든 걸 감내하는 어머니상으로 끝을 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 그렇게 그리는 것도 틀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유수의 작품들이랑 다른가를 고민해보자면, 새로운 성과가 없다는 감상이었습니다. 전달되는 이미지가 분명한데 비해 내용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달리는 엄마, 엇나가는 자식, 와중에 전남편은 새 여자가 생겼다가 잘 안 되니까 시어머니가 재결합을 종용하고... 정말 이런 닳고 닳은 소재들이 한 데 모여서 새로운 감각을 지어낼 수 있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습니다. 흔한 소재다 보니, 너무 편안한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글빨로 자아내기 쉬운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도전의식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카운터를 날린 것은 선생의 아이를 임신한 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작가님이 마트 매대, 청과 코너를 보면서 글을 구성하신 건지. 생명력을 다루는 작가님의 관점이 ‘시들지 아니함’의 대척점에 있다는 게, 그게 또 그 학생의 젊음과 윤의 시듦에 이어진다는 게 썩 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슴께의 단추가 벌어진다’, 이 정도로 그 학생의 성적 성숙을 다루는 것이 다른 기성 작가에 비하면 대단히 양반이고 점잖은 서술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게 또 ‘임신’이라는 소재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계라는 것도요. 필요하다면 더한 묘사도 가능하고, 실제로 이런 상황이면 윤은 더 노골적인 성적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발육 초기의 젊은 여자와, 늙어서 진 빠지고 젊은 여자 부러워하는 아줌마의 구도가, <밸런스 게임>의 서사에 온당한가?를 고민해보자면,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부침을 느껴서, 애까지 말을 안 들어서 지쳐가는 윤에게 젊은 학생은 처음엔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다가 그 학생에 대한 시선이 바뀌는 지점은 놀랍게도 걔도 임신했기 때문, 즉 윤과 마찬가지로 ‘싱싱함’을 상실해서 그렇게 작고 녹슨 송전탑을 바라보며 ‘청승’을 떨었구나...라는 걸 윤이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윤이 꽤나 젠틀하다고 생각했던 건희의 담임선생님의 애를 배서 그랬다... 작가님께서 서사의 반전이라면 반전을 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글이 전반적으로 처지다보니까 긴장감을 주기 위한 장치였을까요?
놀랍게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수의 독자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것도 손쉽게 학생과 담임의 서사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에 대한 묘사가 길게 이어졌던 만큼 어떻게든 관계를 부여해야 작품이 끝나겠구나는 예측이 쉽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라면 당연히 그 둘이 엮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요.
그렇다면 윤이나 이 학생이나 이 거대한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에 대한 궁금증이 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걸 서술하는 순간 눅진눅진, 공들여 축축해진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게 되니까요.
그냥 둘 다 멍청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윤은 누가 뭐라고 하든 미안해하고, 사과하고 참아냅니다. 영민하게 따져내질 않습니다. 윤은 이미 지쳤으니까요.
그런데 팔팔한 이 학생은 이유 없이 대단히 멍청합니다. (임신시킨 선생님에게 따져물으며) ‘풍선처럼 배가 커질걸요?’ 이 학생이 몇 살인진 모르겠지만 교복을 입었다면 최소 중학생 이상인데, 이런 표현을 하는 중학생은 참... 보기 어렵습니다. 고등학생이라면 정말 문제가 심각해지고요. 아련하게 송전탑을 바라보며 고독을 씹던 학생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선생한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보다 나쁜 일은 없다’고 한 것치고 참 빨리 회복을 합니다. 미안하다는 선생에게 자기가 더 미안하다는 식으로. 그래도 사랑하니 그런 것이다 대충 덮고 이해하려 해도 학생의 이상행동은 끝날 기미가 안 보입니다.
대성통곡을 하다가 선생한테 밸런스 게임을 제시하죠.
“여친 집에 다른 남자 속옷? 다른 남자 집에 여친 속옷?”
그러니까 작가님의 시선에서 이런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이 납득이 될진 몰라도,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세계를 설명하는 데 이런 바보들의 행진에 어울리는 대사가 꼭 필요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멍청한 애를 그릴 필요가 있나를 따져 묻고 싶습니다. 만약 이런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학생이 있다면 조롱으로 느껴질 법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무해한 척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윤’은 그 시선으로 누군가를 가해했다는 점에서 이 세계가 의도하지 않은 주제의 붕괴가 일어나는 것 아닐까요.
점입가경으로, 작가님은 윤과 학생의 대비를 담임선생님을 중심으로 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건희는 윤에게 ‘선생님을 주겠다’는 말을 하면서 담임선생님의 성적 매력을 시사하죠. 건희는 굳이 말썽을 부리면서 엄마의 연애를 응원합니다. 건희는 알았을 겁니다. 선생님과의 대화 끝에 묘하게 들뜬 엄마를요.
하지만 그는 이미 미성년자 애인이 있었고, 윤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 여학생은 가능했던 거고, 윤은 그러지 못한 거죠. 용기를 내라 위로해줬던 담임에게 호감을 느낀 윤은 고백하지 않고도 차였습니다. 그렇죠... ‘생명력이 있는 젊은 여자’에게 ‘늙은 아줌마’는 상대도 안 됐던 겁니다. 윤은 완전 우스운 꼴이 돼버린 거죠. 굳이 이렇게 진부한 구도를 선택해야 했나, 계속 의문점만 늘어갑니다.
최소한 작품의 제목이 이 대화에서 등장했다면, 이 대사가 중심 기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찬찬히 다시 봤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초등교사의 애를 가진 불쌍한 학생은
“자, 마지막! 뽀뽀하기? 뽀뽀 받기?”
“그건…… 둘 다.”
그 말이 신호처럼 둘은 입을 맞췄다. 윤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라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그 남자랑 함께 길을 떠납니다.
심지어 윤은 그 ‘용기를 내자’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고, 또 그 멍청한 여자애가 훌훌 털어버린 고민을 한 짐 가득 싣고 제 갈 길을 갑니다. 이 선생에게 용기는 말버릇인가 봅니다. 여기서 용기를 내자는 말이 사용되려면 그 여자애가 용기를 내서 임신중절수술을 받는 것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더 나아가자면 소아성애자인 건희의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왜곡된 성적 취향을 뉘우치고 교직에서 물러나는 용기 정도가 있겠습니다.
저는 소재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얼마나 작가님이 공을 기울였냐?에 대해선 꼭 잘잘못을 따지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또 언급할 가치가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소설은 현실과 맞닿아있는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끼시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저러고 마는 게 정말 최선의 서술이었을까요? 제가 저 학생의 상황이었다면, 어떤 메시지도 느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윤의 서사에 이용당했다는 감정만 듭니다.
이 소설은 생명력에 대한 글입니다. 임신한 개, 죽은 토끼, 청과, 쑥쑥 자라는 건희... 그리고 물기 있는 어구들. 이 모든 장치가 생명력을 희구하는 윤의 조용한 투쟁에 사용됐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생명력 있는 학생이 임신해서, 윤과의 어떤 접점이 생기는 전개가 필요했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학생을 만나고 윤의 날카로워진 감각도 일상으로 복귀한 다음엔 파리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쉽게 소비된 학생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암막 커튼에 가로막힌 깜깜한 집에서, 윤은 계속 침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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