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다!"
스페이드 여왕은 작품 속에서 직접 언급됐다시피, 백작 부인을 의미합니다.
백작부인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게르만을 처단하기 위해 카드로 현신하여 지상에 내려옵니다. (스페이드 퀸이 법의 신 아테나를 상징한다는 걸 떠올렸을 때 푸시킨은 이런 장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은 섬세한 작가임이 분명합니다)
노파의 가련한 양녀 리자를 속이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노인에게 총을 겨눈 악독한 게르만은 이전까지 한번도 쥐지 않았던 카드에 의해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갑니다.
그렇다면 게르만의 비극에 우리는 권선징악의 키워드를 붙일 수 있을까요?
게르만과 백작부인의 대조는 그렇게 단순명료한 주제의식으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게르만의 논변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로 카드 놀이에 힌트를 자신에게 달라 주장합니다.
첫번째 논거는 백작 부인의 손자는 낭비벽이 있지만, 자신은 낭비벽이 없이 돈의 가치를 아는 성실한 젊은이 라는 사실입니다. 이건 근대부터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인간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력없이 부모 돈으로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에게 철퇴를 내려달라는 공정에의 절규이죠.
스페이드 여왕이 만들어질 시기가 근대 시민혁명의 추동기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나름대로 게르만은 진보주의자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 방향이 타인의 행운을 협박으로 빌린다는 점은 잘못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선조의 자산으로 영위하는 한량보다는 또 낫다는 것이 현대인이라면 동의할 수 있는 주장아닐까요.
두 번째 논거는 여성의 감정에 청원하는 울음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떼쓰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니 제발 나의 부탁을 들어달라. 이 전략은 의외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성에 울부짖는 젊은이... 모성찬양이 문학사에서 얼마나 닳고 닳은 항변인지, 하지만 17세기 작품이니 그런 진부함을 따지지 않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징징거림은 대개 유효한 타격을 입힙니다.
세 번째로는 비밀고백의 효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얼마 살지도 않을 늙은이가 비밀을 쥐고 죽는 것보다 한 사람, 자신의 생을 구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만은 총을 든 것 치고 대단히 경제학적인 근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 역시 장기기증을 하라고 설득할 때 쓰는 논리니, 게르만이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닙니다.
위의 논변이 모두 실패하자 게르만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노파는 끝내 답도 없고 맥도 없습니다. 게르만의 수고는 허사로 돌아가고 말죠. 게르만은 결국 포기하고, 모든 죄를 리자에게 털어놓습니다. 이 파트가 굉장히 의아한데, 노파는 왜 다시 의자에 앉았으며 게르만은 왜 리자에게 술술 죄를 고백하는가? 환상적인 묘사라면 환상적이겠지만, 의도된 생략이라고 본다면 게르만이 애초에 그럴 깜냥이 안 되는 인물이어서 너무 긴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사람을 해하면서까지 제 실리를 찾는 족속이 안 되는데 예상과 달리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고, 아직 살아있는 노파를 죽었다고 단정해서 제 발 저린 나머지, 리자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 바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총에 장전이 안 되어있었다는 것만 봐도 게르만의 배포를 알 수 있죠. 이 해석이라면 게르만이 <주제파악>을 못한 인물임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성공에의 열정만은 남아 그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마시고, 노파의 환영을 보고 3,7,1 이라는 비밀번호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1은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로 스페이드 여왕을 골라버립니다.
결국 게르만의 선택이 게르만을 비극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누군가 발로 차서, 누군가 구렁텅이로 끌고가서 생긴 일이 아니라 게르만이 그렇게 결정한 일입니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 청산별곡 中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 '한'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겪는 비탄을 드러냅니다. 누가 선택한 일도 아닌데 돌을 맞는다든지, 누가 벌인 일도 아닌데 책임을 뒤집어 쓴다든지 하는 한의 서사는 현대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비련의 여주가 어떤 운명에 이끌려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라든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별과제에서 빌런을 만났다든지 하는 내용으로 말이죠. 하지만 '가장 불쌍한 이는 누구인가'를 고민해보았을 땐 훌륭한 대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인생을 개척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족족 실패만을 겪는 사람이죠. 영화 <미스트>의 주인공이 딱 그렇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들에게 대단한 위로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 나서가지곤!" 이라는 평이 대다수입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니 인간은 그냥 가만히 현상태가 유지되는 것을 내심 선호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라고 저는 답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냥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려고 했는데, 누가 와서 돌을 던졌고 나는 이에 대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구원자가 와서 나를 구해주는 서사. 웹툰이나 드라마에서 엄청나게 잘 팔리는 구성 아닌가요?
왕실이나 황실, 귀족 문화에 대한 아련한 선망 역시, 그 은은한 보수주의의 추구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척스러운 사람들이 끝내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저 멀리 '누군가'가 그랬으면 몰라도, 나는 못했는데 내 옆의 친구가 그랬다고 했을 때 이상하게 꺼려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페이드 여왕, 백작부인은 게르만과 똑같이 부정한 방법을 추구하고 실제로 그걸 얻는데 성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게르만과 달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갑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게르만에게 복수까지 성공합니다.
사치스럽고, 남편에게 폭력을 쓰는 젊은 백작 부인은 생제르망의 덕택으로 빚에서 벗어납니다. 그저 생제르망의 자비로, 백작부인은 위기에서 쉽게 벗어납니다. 그 후로도 떵떵거리면서 잘 삽니다.
반면 게르만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아버지한테 도움도 많이 못 받고 그나마 받은 쥐꼬리만한 유산도 잘 저축해두고 경솔하게 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한순간의 모험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다니, 평생을 막 산 백작부인은 인맥을 활용한 구걸 한 번에 모든게 해결됐는데 말이죠. 저는 <스페이드 여왕>을 읽고 나서 묘한 기시감에 화가 났습니다. 이건 우리 현실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불공정의 전형입니다.
게르만은 주제 파악을 못한 죄로 미쳐버린 것입니다.
스페이드 여왕과 에이스를 구분하지 못한 죄.
귀족인 노파, 스페이드 여왕에게 고작해야 이민 2세, 에이스 게르만의 승패는 뒤집을 수 없는 카드 게임의 족보처럼 견고하게 정해져있는 것입니다.
저는 귀족 출신 푸쉬킨이 아주 자기다운 글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은연중에 깔려있는 하층계급에 대한 은은한 무시가 참 재밌었습니다. 그나마 가만히 할머니 병수발 잘하고 주제파악 잘 한 리자도 건실한 총각을 만났다니, 평민에게 대단한 지침을 내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 덧붙여서, 게르만은 왜 게르만인지 궁금합니다. German이 맞는지, 맞다면 참 성의도 없고 예의도 없는 작명이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일본 소설에서 한국인이 성은 조, 이름은 센징으로 등장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 '조센징'이는 조선인이라서 성실하고 화가 많다"
로 서술된 문장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 이 소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신 분은 만화 <도라의 저택>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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