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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읽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잡다구리

 

 

왜 하필이면 28쪽에 여백이 많았을까
왜 하필이면 마리안느가 다 실릴 수 있게 그렇게 넓었을까?
28쪽의 여백이 좁은 곳이였다면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잊기 쉬웠을까

나는 영화 볼 때 개연성 따지는 병에 걸려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28쪽이 좀 더 다른 쪽같이 빽빽했다면..

 

영화는 이미 많은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시선으로 전개된다. 두 인물은 평등한 시선을 사이에 두고, 장력으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화가가 모델을 바라볼 때, 모델 역시 화가를 바라보고 있고 그 시선의 교류는 사랑을 설명하는데 충분하다.

영화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초상화가 다시 그려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첫번째 초상화는 마리안느가 도둑질한 시선으로 바라본 엘로이즈가 그려져있다. 이 시선은 평등하지 않다. 모델이 모르게 훔쳐낸 모델의 상은 화가 자신의 시선이 아닌, 관람자(남편이 될 자)의 시선을 빌어 천 위에 투사된다. 모델 위의 화가, 심지어 그 위에 제3자가 지켜보는 그림에 평등은 부재하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고 말하긴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퀴어영화에 사랑의 정당성을 요구하지만 사실 사랑이란게 설명이 수반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보면 생략되고 편집당하는 것이 맞다. 이 영화정도면 굉장히 친절한 축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그를 훔쳐보다 묘하게 그들 사이의 시선이 맞춰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림을 위한 당위성은 상실되고 오롯이 사랑을 위한 동등한 눈맞춤이 남아 있다. 영화의 브릿지로 사랑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이 이유가 되는 응시가 자리잡는다.

마리안느가 진실을 고백하고 엘로이즈에게 초상화를 보여줬을 때 엘로이즈는 혹평을 쏟아붓는다. 화가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마리안느는 자신의 캔버스를 망쳐버린다.

남편이 좋아할만한 상기된 볼, 정숙하게 모은 자세.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준 두 번째 기회에서 그것들을 없애버린다. 엘로이즈의 포즈는 보다 역동적인 사선으로 변하고 가짜 미소는 걷어진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포즈를 위해 단상을 준비해 뒀기 때문일까.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묘사하면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묘사하는 식으로 둘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엘로이즈가 한순간이라도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남편과는 한순간도 그런 평등한 눈맞춤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초상화로 선택당하는 여인은 끝까지, 시선의 끄트머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다. 마리안느와 했던 11일 간의 줄다리기는 기울어진 상태에선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모티프의 도움을 받는다.
첫 번째는 오르페디우스 신화
두 번째는 비발디 사계 <여름>
음악엔 문외한이라 두번째는 '어디서 들어봤는데 뭐더라' 정도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첫 번째 신화는 말 머리만 들어도 '아 이거' 생각이 들었다.
두 개 다 대중적인 소재기 때문에 관객들이 감정선을 잡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알고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처음에 마리안느가 캔버스를 위해 바다로 뛰어들기까지 해서, 캔버스가 하나밖에 없나했다. 그래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결혼을 위한 초상화에 덮어 씌웠나, 결국 엘로이즈는 결혼하지 않은 걸까 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결국 그건 아니었지만...

클로즈업은 내가 정말정말정말 좋아하는 기법이다.
위플래시도 그렇고 딘 인스타그램 뮤비도 그렇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아델 에넬의 연기에 갸우뚱하면서 봤는데 마지막 장면으로 모든 의문이 다 사라졌다. 그 3분 만으로도 그는 마리안느가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