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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읽기

다큐멘터리 <웨이스트랜드> 리뷰

 

쓰레기를 예술로 (혹은 예술을 쓰레기로) 만든 작가 빅 무니즈

 

 

<웨이스트 랜드>의 빅 무니즈가 추구한 목표는 모호하다. 누구도 그가 카타도르에게 가져다 준 것이 희망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빅 무니즈가 그들의 세계를 침범하고, '그들의 세계를 밑바닥이다'라고 감히 평가하는 세계에 그들을 직접 데려가고, 약탈자의 잉여자산으로 작품을 경매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다큐를 도저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돈이 많은 누군가가 내게 저 높은 곳에서 지시하고 나는 그의 말대로 쓰레기를 두고, 내 인생을 전시한다면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딱 그 정도의 마음에서 나는 화가 났다. 빅무니즈가 스스로의 평가를 떼어놓고 카타도르 그 자체의 의미를 찾아주고자 했다할지라도 그와 그라마초 간의 위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자본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만의 예술관이 있다. 그는 마치 카타도르와 함께하는 듯 하지만 그 시간은 그의 인생에 아주 잠시 일뿐이고 그는 다시 뉴욕의 비싼 작업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결코 그라마초에 영원히 거주하지 않는다. 혹자는 엔딩에서 변한 카타도르의 모습을 통해 빅 무니즈의 활동이 결코 의미 없는 희망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큐의 완결은 결코 카타도르의 인생에서 한 챕터의 엔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메라 렌즈에 담기지 않는 다층의 감정을 안고 이어지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빅 무니즈가 안겨준 희망은 여러 갈래로 나뉠 것이다. 카메라에 어떻게 담겨있든 간에.

 

 

 

쓰레기가 삶이 되는 곳 자르딤 그라마초

 

 

빅 무니즈의 시선은 그라마초 그 자체를 인정할 것인가, 혹은 그라마초를 부정하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라고 할 것인가에서 딱히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변화했다고 느꼈다는 자체도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담은 조작된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전달됐을 뿐이다. 빅 무니즈는 도덕적 냉소를 통해서 정치인이 개입해서 해결하는 빈민의 문제를,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기존의 다큐의 위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기존의 예술을 비웃으며 배우지 않은 카타도르도 할 수 있는 예술을 주요한 예술 씬에 전시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카메라에 비친 상에 불과하며 관람객은 진실로 안전한 자리에서 몰입되는 ‘것 같은’ 감정만을 소비할 뿐이다. 빅 무니즈가 무릅쓴 위협 자체는 관람객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람객을 기만하는 것은 빅 무니즈의 대답하지 않은 시선보다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배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우리를 배제하고 또 우리가 그 안을 우리의 인생에서 배제시킨다. 상호 배제된 곳에서 객체로 그려진 카타도르는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루시 워커 역시 객관성의 허구를 인지하고 관찰자로서 개입하는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감독의 시선을 빌려 객체를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측은한 시선에서 빗겨나서 그들이 보다 주체적으로 쟁취하는 삶의 단면을 관찰하며 그 전의 자신을 붕괴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로튼 토마토의 높은 점수는 이 다큐멘터리가 담고 있는 시선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가 남겨놓았을 그라마초에 함께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로튼토마토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웨이스트 랜드

<웨이스트 랜드>에 등장한 카타도르들은 빅무니즈의 잔해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한다는 감각 역시 근대화의 기획으로, 미발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노클린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유무형의 강박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내심 빅무니즈에게 들었던 반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노클린 리얼리즘에서 등장하듯 우리는 끊임없이 대상의 의미를 착취하기 위해 애쓴다. 상징화된 십자가, 수태고지, 월계관 등 중세 기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 내포된 의미가 있기를, 또 그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기를 인간은 간절히 원한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예술은 유치원생이 그렸냐는 빈정을 듣는다. 현대의 추상화가들이 대중에게 받는 비난은 대개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빅 무니즈의 냉소처럼, 예술이 꼭 전문가가 창조한 의미를 품어야만 하는가라는 의심이 뒤따른다. 여기까지가 수업의 여운이 남았을 때의 생각이었고, 나는 관성적으로 현실에 돌아와 달려오는 고지서나 과제 따위를 보며 예술을 하지 않는 세계의 지표면에 발을 붙였다. 사회가 예술을 필요로 하듯이 예술도 구질구질한 사회의 단면을 껴안고 있다. 해방을 꿈꾸는 혹은 사회가 작위적으로 부여한 가치를 앗아간 예술 역시 아주 속세적인 삶의 단면이 없다면, 그러니까 인간이 없다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구색을 맞춰 살기위해 우리는 같은 인간만이 해줄 수 있는 평가와 인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오로지 살기 위하여. 누군가가 우리를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의 돈을 얻어갈 수 있다. 지디가 유명해서 똥을 싸도 박수받을 것이라는 평론가의 말처럼, 다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돈을 벌 것이고, 그래서 그는 아주 못 배운 사람이나 할법한 일들을 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이래저래 설명을 덧붙였지만 비판으로 들리는 건 사실

현실에 발 딛은 나는 이런 인정을 아예 무시하고 살 순 없다고 단정한다. 때문에 빅 무니즈가 그라마초에서의 예술이 당장 돈 깨나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인정받는 예술은 허구에 가깝다’고 조롱하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면, 그 기저에 깔린 기만에 치가 떨린다. 그의 참 뜻이 그들을 향한 조롱이 아니라 카타도르에게 향하는 계몽이라면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니가 뭔데?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가 가져온 영향력은 카타도르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세계를 넓힌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온실에 앉아 떠벌리는 나보다 당연히 빅 무니즈가 카타도르의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책임도, 그들을 평가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빅 무니즈만큼은 그가 던져놓은 카타도르의 세계에 책임을 갖는다. 나는 나의 안온한 삶을 위해 애써 빈민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늘 그래왔듯이 무책임한 쓰레기 투기를 일삼을 것이다. 그러나 빅 무니즈만큼은 높은 곳에서 지시한 초상화의 객체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웨이스트 랜드>의 출연진엔 카타도르의 이름이 없다. 오로지 빅 무니즈의 이름만 담길 뿐이다. 따라서 로튼 토마토의 높은 평가도 사실상 빅 무니즈나, 루시 워커에게 향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브레히트 식의 판 깨기가 아니라, 오로지 예술로만 할 수 있는 이세계의 몰입을 시도했다. 만약에 앞서 언급했던 조롱이나 계몽이 아니라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다른 의미를 탐구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노클린의 리얼리즘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했다. 글을 읽고, 의미를 탐색하고 평가하는, 예술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벗어던짐으로써 기성의 정식들,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지식을 비운 채 이 세계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느꼈다. 

 

예술에 대해 unlearn했던 나는 비교적 이런 과정 자체는 손쉽게 달성했다. 나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20년간 살면서 또 4년은 대학에서 전공으로 배우면서 파렴치하게도 학부생 주제에 사회학도라는 이름을 달고 다녔다. 때문에 예술과 사회에서 사회가 얼마나 내게 중요했는지는 떼놓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술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사회보다는 쉽게 비울 수 있었다. 그 전의 예술을 모르고 노클린의 리얼리즘을 접하니 나도 쉽게 ‘기존의 관습과 도식, 없어도 좋을 법한 버팀목이지’라는 무책임한 말을 뱉을 수 있었다. 때문에 빅 무니즈의 예술이 그냥 허망한 것이라면, 어떤 의미도 없고 단지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 존재하는 양태로 그리고자 했다면 나는 이것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잔여감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업이 예술과 과학이나, 예술과 윤리라면 더 쉽게 작품을 받아들였을 텐데 <예술과 사회>라서, 나는 카타도르의 작품이라곤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빅 무니즈의 작품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클린이 드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덜 알려진, 희소한 이유로 관찰을 직접하고 현재에 몰두할 수 있는 소재를 골랐다고 언급했을 때에도 딱 이런 감정을 느꼈다. 드가는 무희를 그려 분명 소외된 자들을 작품 세계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넓혔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실제 세계에서 그는 무희를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착취하지 않았나. 아트티(Artsy) 줄리아 월코프는 아주 사회적인 칼럼 ‘드가의 발레댄서 이면에 숨은 추악한 진실’을 통해 드가가 어린 발레리나들에게 몇 시간 동안이나 뒤틀린 포즈를 취하게 하는 학대를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아주 타자의 시선에서 어린 무희들을 대상화시키고 있다. 드가의 그림은, 그러니까 그의 잘난 그림은 무희들을 다층적인 착취의 세계로 몰아넣은 것은 아닌가. 또 정말 주체가 자신을 그리는 예술은, 평가가 아닌 예술은, 때문에 독백이나 취미에 불과한 예술은 누구한테도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 허무함을 느꼈다. 드가가 자신을 그린 그림을 운 좋게 살롱에 들어간 무희가 보고, ‘나 역시 예술의 한 영역이 될 수 있구나’를 느끼고, 또 그것을 스스로 표현했다면 만약 정말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일어났다면 나는 그의 예술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어렴풋이 보이는 턱시도가 얼마나 야만스러운지

 

 

그렇지만 내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는 것을 멈추고, 또 ‘그것이 알고 싶다’ 식의 오만한 판단을 멈추고 예술을 바라본다면 무희의 그림이 나에게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애초에 나를 위한 예술은 아니었으니, 나는 시야 밖에서 펼쳐질 씬들을 지우거나 막연하게 믿을 수도 있다. <웨이스트 랜드>를 보고 나는 볼 수 없는 곳에서라도 카타도르가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긍정하거나 혹은 자신의 세계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탈출했다면 나는 이 다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탈출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 한참을 맴돌았다. 내 밑바닥에선 여전히 그라마초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긍정하는 그들의 세계는 나로선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분명 거기서 역동적으로 살고 있다. 나는 또 빅 무니즈처럼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 그러나 감히 하루에도 몇 키로의 쓰레기를 배출할지 모르는 내가 안면 몰수하고 도망치라든지, 거기서 잘 살고 있으라든지의 말을 남길 수 있는가? 나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간의 몰입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나 사회가 멋대로 객체로 처박아 놓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자기 연민 같은 시시한 방식이 아니라 자의식을 온전히 옮겨놓고자 하는 불가능의 시도가 이 다큐멘터리의 모호한 부분을 해소시킬 수 있다. 나는 또 나대로의 삶을 살겠지만 적어도 나의 삶, 어느 정도의 희망과 막막함이 혼돈된 집합체가 카타도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 수 있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서 북극곰이나 펭귄을 구하지 못하듯이, 쓰레기를 줍는 카타도르를 위해서 쓰레기를 더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 왜곡된 자의식을 해체하고 내가 그렇게 카타도르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나 빅 무니즈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해서 좋다고 평가할 수는 없고, 그냥 내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들을 배치시켜주어 모르던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무던한 감각을 남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