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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읽기

위플래시 리뷰

필요한 짓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신천지가 코로나를 휩쓴 춘삼월, 사랑제일교회의 집회로 다시금 코로나 대확산이 일어난 8월이 지나고, 대한민국 누리꾼은 종교라면 치를 떨게 됐다. 누리꾼의 혐오를 정리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비이성적 행위로 사회에 피해를 끼치는 악‘이다. 해당 비판에서,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가 ‘악’이라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다. 얌전히 사회의 규율을 따랐는데도,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 개인으로 내 삶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러나 전자, 종교를 비롯한 비이성적 행위를 평가 절하하는 건 타당한 일인가? (이 글은 절대 '일부론(문제있는 교회는 일부야!'을 펼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근대 계몽주의 이래로 이성은 사회 발전의 선두에 크레딧을 올렸다. 감정의 영역을 묵살시키는 이성 절대주의가 이렇게까지 독재를 펼치는 현상이 정당한가? 무엇을 믿느니, 사랑하느니 따지기엔 벅찬 생활의 연속이고, 과학이 가져다준 문명의 이기 덕분에 고민없이 살아도 어떻게 먹고 살 수는 있다. 오히려 사랑이나 신념이나 감정따위를 가지면 더 살기 불편하다. 예민한 사람, 멍청한 사람 낙인이찍혀서 ‘이성적‘인 사람들이 놀려먹기 좋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 정말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게 우리 삶의 전부일까? 감정을 극대화시켜주는 종교나 예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영화 <위플래시>에는 먹고 사는데 하등 쓸모없는 드럼이 나온다. 그리고 쓸모없는 드럼에 미친 두 사람이 나온다. 플레처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일 때도있지만 어쩐지 그 편은 진짜가 아닌 것 같다. 틀리지도 않은 음정을 틀렸다고 학생을 몰아가고, 박자를 틀린 앤드류에게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낼 때의 그가, 화를 쏟아낼 때의 그가 ‘진짜’ 플레처같다. 영화 아카데미에서 수준 높은 수업을 듣고 수도 없이 많은 글을 써낸 작가들이 정교하게 대본을 짜도, 힘없게 무너지는 대사들이 있다. 결국 인물의 말은 허구라서, 치밀하게 구성을 해도 그 안에 감정이 없다면 파리하게 나불대는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인물이 날 것을 뱉을 때,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그의 눈동자에서 행간에 숨은 대사를 읽으려 든다. 찾아낸 대사가 정답이든 아니든, 영화와 관객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트럼본 연주자에게 분노하는 플레처를 통해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장면 이전에 안락한 삶을 누리던 우리는 없다. 그의 분노가 언제 주인공으로 향할까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다. ‘플레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나’ 마치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다음은 네 차례야

 

 

<위플래시>는 특유의 긴장감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귀신 영화나 재난 영화처럼 누군가 드럼을 치다가 죽을 리 없는데, 감독은 인물과 관객을 ‘고작’ 드럼때문에 사지로 내몬다. 자꾸 플레처의 옛 제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여기서 감독은 현실에서 ‘null’상태에 가까운 삶의 목표를 ‘드럼’으로 치환시킨다. ‘드럼을 제대로 치지 않으면 죽어!’라는 강제를 주입시켜 러닝타임 내내 우리를 드럼의 신봉자로 만들어버린다. 구성의 탁월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이미 결말이 났는데도 이야기를 어떻게든 끌고 나가야 할 때, 많은 감독들은 반전이나 등장인물의 추가로 플롯을 복잡하게 꼬는 방법을 택한다. <신과 함께>에서 부러 동생과 엄마의 서사를 집어넣는 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옥을 도느라 바빠 죽겠는데 원작만화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어떻게든 넣어야 하니, 지옥을도는 주인공의 서사와 동생의 서사를 중첩적으로 배열하는 수밖에 없다. 덕분에 이야기는 분산된다. <위플래시>는 이에 비하면 정말 단순한 구조로 이뤄져있다. 앤드류는 드럼을 잘 치고 싶고, 플레처는 앤드류가 불만족스럽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가족과 싸우는 이야기는 부차적인 이벤트에 불과하고, 드럼을잘 치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전개를 이끈다. 단순한 구조엔 구심점이 생겨서, 관객들을 스토리로 끌어들인다. <위플래시>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눈을 떼고 볼 다른 것도, 다른 걸 볼 여유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장면의 정교한 배열은 관객들의 여유를 앗아가는데 큰 역할을 수행한다.

 

정말 이랬어야만 했나. 구조의 과잉은 감정의 과잉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명장면은 영화를 설명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다. <위플래시>의 명장면은 당연히 엔딩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병치일 것이다. 앤드류와 플래처의 시선이 맞닿고, 마침내 플래처의 안광이 관객을 비출 때. 우리는 숨이 멎는 공포를 느낀다. 그가 앤드류를 광기에 처박은 것처럼, 우리를 채근한다. ‘내 템포에 따라오고 있냐고?’ 그 상태로 영화는 끝난다. <위플래시>는 훌륭한 음악 영화인 한편 훌륭한 비주얼 영화다.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이 둘 사이의 긴장을 묘사했듯이, 영화는 음악이 아닌 장면으로 설명하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카메라는 멀미가 날 정도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박자에 맞춰서 쉴새 없이 화면 전환이 일어난다. 마지막 장면엔 아예 대놓고 카메라 문법을 깨부순다. 두 명을 비추는데 카메라 한 대를 이러저리 휘젓는 건 대학생도 안 할 유치한 방법이다. 움직임만 따지면 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브이로그 같은데, 정확히 앤드류의 흔들리는 감정에 맞춰서 너울거리는 카메라 워크는 맥락과 박자를 맞춰 전혀 어색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위플래시>엔 대단한 미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현란한 색감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다 죽어가는 남자두 명이 칙칙한 배경에서 칙칙한 옷을 입고 징그러울 정도로 화를 낸다. 그래도 계속 보게 만든다. 흔히 봤던 필수요소들을 다 빼고 ‘봐야 될 것만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고집이, 오히려 완벽한 장면들을 만든 셈이다.

 

 

대사 없는 장면, 서사 있는 시선

 

새로운 것, 특별한 것.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그런 예술이다. 누가 한 번 해놓고 나면 ‘나도 할 수 있었는데?’ 말하는 건 쉽다. ‘콜롬버스 계란 세우기’처럼, 밑둥을 부수고 세워놓는다는 정답은 알고 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레퍼런스가 전무한 영역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게 평범한 사람의 태도다.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선행 연구를 참고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위플래시>는 새로운 걸 해냈다는 점에서 또한 위대한 영화다. 지금까지 ‘드럼’에 대해 진지하게 다룬 영화가 몇이나 되나? 밴드를 다룬 영화는 많았어도 드럼만 치는 영화는 없었다. 엔딩에서 대사를 제거한 영화는? 주인공 대사 70%이상이 혐오 발언인 영화는? 이렇게 생각해보면 감독이 얼마나 큰 도전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내가 데미언샤젤의 히트작 <라라랜드>보다 <위플래시>를 더 높게 평가하는 데는 바로 이런 도전정신과 참신함이 <위플래시>에 더 많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위플래시>는 음악 영화가 쌓아올린 관습들을 걷어차고 이성적으로 재단하려 드는 관점을 거부한다. 노골적으로 평가하자면, 데뷔작에서 <라라랜드> 대신 <위플래시>처럼 매니악한 재즈영화를 냈다는 거 자체가 샤젤이 ‘광인’인 증거다. 그리고 그가 ‘이성’적 정교화를 거부하는 광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다.

 

 

안 보고 배겨? 이래도? 이래도? 싶은 <라라랜드>의 성공적 장면들

 

 

<라라랜드>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예쁘고 잘생긴 배우가 나와서 몇 번의 좌절을 겪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꿈같은 인생을 산다. 음악도, 영상도예쁜 것 투성이라 보고 있으면 설렐 수 밖에 없다. 주인공 둘이 꿈을 위해 사는 것도 타당해 보인다. 재즈바를 차리고,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는 건 누가 봐도 그럴 듯한 꿈이다. <위플래시>의 앤드류는? 그 주변의 모두가 그의 꿈에 지쳐서 떨어져 나간다. 관객 역시 처음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아니 드럼이 뭐라고?’라는 종류의 생각 말이다. 하지만 플래처의 계략에 의해 앤드류가 ‘카네기 홀’의 연주를 망치고, 앤드류가 광기 어린 눈으로 캐러번을 연주할 때, 우리는더이상 앤드류를 타박할 수 없다. 오직 그가 드럼 연주를 성공하는 지, 혹은 또 망쳐버리는 지에 집중하면서 현실의 여러 조건들, 심지어 연주가 끝난 직후의상황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못한다. 나는 이런 몰입이, 이성적으로 절대 옳지 않은 판단들이 <위플래시>만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가 마주했던 그 어떤 세계와도 다르다. 우리는 하릴없이 이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극작가들을 비난하며, 모방의 모방만 할 줄 아는 족속들을 아테네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작가에 대한 과도한 경계는, 결국 현인인 플라톤마저 극을 두려워 했다는 반증이다. 견고한 로고스의 성전을, 파토스가 모조리 파괴해버려서 플라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상황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나는 파토스의 파괴적 성향이 우리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없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해도 인간은 격정을 숨길수 없는 상황에 분명 부딪히게 된다. 또한, 이성이 옳다고 세뇌를 시켜도 감정적 요소가 사람들을 동원하는 순간을, 영원히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규교육과정이 사람을 종교로부터 떼어낼 수 없어서, 사람들은 신천지를 믿고, 전광훈을 믿는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아서, 또 세상은 그런 인간에게 너무 잔혹해서 우리는 이성적으로 따지는 걸 포기하고 나 아닌 어떤 것에 ‘비이성적으로’ 자아의탁을 해버린다.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어떤 대상에의미를 부여하고, 본인의 감정을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예술도 종교 같아서, 예술이 없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굶어 죽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지탱해내는 삶의 한 축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우리는 하잘 것 없는,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스크린에 울고 웃는다. 

 

<위플래시> 이후에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앤드류는 빈 껍데기 인간이 되어 30의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2의 찰리파커가 되겠다는 앤드류의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인가? 잘한 선택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결국 그 선택을 정당화해주는 좋은 결과가 따라줄 뿐이 아닌가. 그가 한 번이라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바꿔서라도 도달하고자 했던 예술의 경지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가? 단순히 더 많이 살아가기위해서 드럼을 버렸어야 한다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분명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앤드류가 플레처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고, 그의 인정을 받는 순간에 안도했을 것이다. 바로 그 감정이, 우리가 앤드류의 선택을 응원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바로 이 문장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