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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읽기

노클린 리얼리즘 다시 읽기, 비판적 사유로서의 리얼리즘 - 역동하는 시간 속에서 리얼리즘이 현대에 갖는 의미

비판적 사유로서의 리얼리즘 - 역동하는 시간 속에서 리얼리즘이 현대에 갖는 의미

 

 리얼리즘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리얼리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이전의 세대와 구별되는 형식, 즉 현실 자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과학적인 관찰에서 기반한 표현수법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외현적인 특징들로 리얼리즘 사조에 대한 서술을 완성할 수는 없다. 리얼리즘은, 탄생된 시대의 맥락 속에서 추구한 가치들, 평면에는 구현되지 못한 이상적 지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로 여기서 리얼리스트들은 실재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는 선언 위에서,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자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가진다. 그들은 결코 가치의 진공상태에서 도식으로부터 탈피한, 리얼리즘 본연의 무의미함을 창출할 수 없다. 교묘한 변이체, 시간이나 환경, 퍼스낼리티가 배양되는 환경 속에서 태어난 리얼리스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관습화된 상징들과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허위를 느끼고 탈출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탈출은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본질에 의해 온전한 상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예술가의 존재는 무위의 세계에서 탄생할 수 없다. 예술가의 저항은 저항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에서의 학습을 전제한다. 또한, 리얼리즘이 지향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단지 망막에 맺힌 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의 문제와 연관된다. 지각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은 결국 예술을 구현하는, 존재하는 예술가로 인해 시대의 관습에 끊임없이 제약받는다. 

 

 그러나, 예술은 결국 그 제약을 바꿔나가고자 하는 시도 자체로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리얼리즘의 논의로 돌아가 리얼리스트가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알 수 있다. 린다 노클린이 이야기하는 프랑스 리얼리즘 운동은 진보적 격변의 시기인 1848년부터 모순을 품고 있는 제 2제정기까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이 속에서 리얼리스트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의도적’으로 담지 않으면서 대중이 기대하는 ‘의도’를 파괴한다. 결과적으로 리얼리스트의 예술은 19세기,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퇴행된 체제에 함몰돼있는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며, ‘불편함’을 준다. 리얼리스트는 어린아이를 추구하지만 절대로 완전한 어린아이로 읽힐 수 없다. 그는 그의 예술을 정치로부터 괴리시키는 작업을 통해 관찰자에게 다분히 그의 의도성을 느끼게 만든다. 의도적이지 않은, 무의미한 주제의 선택은 관성적인 주제 설정보다 인지적 노력을 더 많이 요구한다는 점에서 순진하지 않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철없음은 용납되지만 반항기의 청소년이 세계의 진실을 깨닫고, 세계에 본인의 자리를 요구할 때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는 것처럼 기득권은 저항이 엿보이는 리얼리즘 예술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리얼리즘이 여는 새로운 차원은 당대 기존 질서에겐 위협으로 다가갔다. 

 

 리얼리즘은 위에 언급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저항하는 사조다. 리얼리즘이 당면한 문제란 탄생시킨 예술가의 학습을 부정해야 한다는 자기극복의 난관, 또 리얼리즘이 제기하는 도전에 위협을 느끼는 기존 체제의 반발이다.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추동한 사회에 반기를 들어야하는 패륜을 저질러야 하며, 이로 인해 본인의 정치적 기반을 잃는다. 이러한 한계는 리얼리스트로 하여금 존재 보존의 투쟁에서 아웃복서가 되게끔 만든다. 리얼리스트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정치적 조건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표현을 삼갔다. 단순히 분노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풍속화적으로 당대를 그리되, ‘사회적 조건에 중요한 연루’를 함축함으로써 리얼리즘은 기존의 세계에 위협을 가한다. 이는 ‘번역’이라는 말로 풀어지기도 한다. 번역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신비론적으로 실체화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풀어지는 것이다.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와 다른 언어 간의 관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다른 언어의 세계로 확장한다. 리얼리스트는 세계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며, 규범화된 가치들을 거부한다. 이로써 그는 status quo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에 동참하게 된다. 

 

 리얼리즘이 이러한 투쟁을 통해 탈취하고자 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노클린이 바라본 19세기는 기득권에 의해 본래의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다. 동시대성을 상실한 역사화는 ‘가치 있는’ 역사적 사건, 영웅적 행위를 재현하며 다른 시대를 끌어온다. 소멸된 과거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전유하고자하는 야심찬 시도는 회화라는 평면위에서 계산적으로 건설된다. 이는 평면으로 완벽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완성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아간다. 여기서 시간은 평면자체에서 완결되는 연속성과 통일성을 추구한다. 의미 있는 동작이 요약된 시간의 경과는 관찰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리얼리즘 이전의 예술은 이러한 서사를 통해 사회 질서를 옹립하는 기존의 가치들을 보여준다. 반면 리얼리스트는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인간이 붙어있는 환경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다.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은 리얼리스트들은 오로지 객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들을 검토하고 이를 물질적 언어로 구성했다. 이로써 예술이 시간적 연속성에서 품었던 규범들은 리얼리스트들의 시간적 단편에 의해 쪼개졌다. 예술가가 지각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은 기득권층이 향유했던 보수적 가치들을 비웃고 어떠한 판단을 품지 않는다. 예술가와 관찰자의 위계적인 정보 전달은 리얼리즘을 매개로 평등하게 변화했다. 리얼리스트는 단지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순간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줄 뿐이고, 관찰자는 그들이 재현한 순간 속에서 사실들을 목격하게 된다. 

 

 분산된 시간적 단편 속에서 리얼리스트는 보다 넓은 소재를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 가치에 얽매여있던 시간들에서 해방되고 본래의 시간으로 돌아온 예술가는 동시대의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인지적 여력이 생겼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던 ‘하잘 것 없었던’ 동지들에게 시선을 돌림으로써 리얼리스트는 그들을 기꺼이 거대한 평면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을 빌려 그들을 보수적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헛된 시도가 아닌 그 ‘하잘 것 없음’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뤄졌다. 오로지 진실만을 보여주고자 했던 다짐으로 리얼리스트는 그가 감행하지 않았던 탈출을 성공한다. 그의 진정성은 도덕적 참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근거, 경험적으로 감각하지 않은 소재를 차용해 ‘이것을 따르라’고 명령하는 예술은 기만적이다. 반면 솔선수범하여 본인 스스로 진실된 것만을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리얼리즘 예술은 기만적인 예술과 달리 ‘정직’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 가치 있는 것만이 회화적으로 재현될 권리를 부여받는 시대는 리얼리즘으로 인해 붕괴됐다. 리얼리스트가 공인된 가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며 기존의 가치체계는 전복됐다. ‘아무 것도 아닌’ 주제가 그 자체로 다뤄지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기대면서까지 유지하고자 한 전통의 가치의 존재의미는 회의되기 시작했다.  

 

 리얼리즘은 양식이 아니라 사유가 중요하다. 19세기 리얼리스트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 핍진성에 대한 욕망을 발현하며 기존의 것을 비판적으로 회의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예술사에서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의 성서비평, 신지질학, 과학적 사고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결국 리얼리즘은 그들이 파괴한 전통에서 비롯된 역사적 흐름에 기대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리얼리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배양된 샬레를 의심하고 지각의 진실을 찾으려했다. 이때 리얼리스트가 추구한 사실적 묘사는 개별 주체의 지각체계에 따라 다른 양식으로 나타난다. 쿠르베는 <돌 깨는 사람들>, <오르낭의 매장> 등의 그림에서 보이듯 감정을 말살한 채 경계가 분명한 선명한 윤곽이 도드라지는 묘사를 보여줬다. 반면 모네는 <수련>, <파라솔을 든 여인>처럼 번지는 빛을 평면에 옮기려는 시도로 몇 번에 걸쳐 붓질을 겹치며 윤곽이 불확실한 그림을 그렸다. 이처럼 사실 그대로를 화폭에 담는다는 공통의 목표는 각기 다른 양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으로 특정할 수 없는 개별 표현 양식이 아닌 비판적 사고에 진정한 의미를 둔다. 

 

 삶을 규율하는 제도에 저항하고자 다짐한 현대인은 리얼리즘의 비판적 사유를 원용할 수 있다. 리얼리즘을 논한 린다 노클린 역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질문을 던진 미술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저술인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는가?」에서 노클린의 비판적 사유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미술사가 사회 세력과 문화 이데올로기적 담론 체계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을 밝히며, ‘위대한 예술가’의 인조적 신화에 대해 지적한다. 또한 위대한 예술가로 명명되지 못한 여성들의 문제가 사실상 미술사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전제의 오류를 담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성 예술가는 남성중심사회가 제시하는 예술사를 학습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는 여성성을 이유로 남성중심사회에 의해 주류세계에 편입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때 막시밀리안 황제의 죽음을 미화하는데 의문을 품은 쿠르베처럼, 혹은 유물이 된 종교적 신조를 대체하고자 한 콩트나 푸리에처럼, 여성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예술을 통해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린다 노클린은 성 차별을 전제한 가부장 사회, 여성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는 불평등한 교육제도를 지적했다. 마치 리얼리즘이 ‘하찮은 것’을 주제로 삼아 그 존재를 수면 위로 이끌 듯, 노클린은 논문에서 여성을 의도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인지하게 만든다. 배제됐던 여성의 존재는 미술사의 근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의 진짜 세계는 여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세계를 투영하는 예술엔 왜 여성이 없는가? 그는 강단 미술사에 등재된 리얼리즘을 19세기 리얼리즘으로 환원시키고, 리얼리즘의 본래 의도대로 그의 ‘동시대성’ 안에서 리얼리즘을 이해하고자 한다. 

 

 노클린의 여성주의는 19세기 리얼리즘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당시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창가는)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처럼 여성을, 남성인 화자의 도구화하는 태도는 19세기 지식인 사이에 만연한 것이었다. 작품 밖 실재하는 현실에서도 여성혐오는 뿌리 깊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여성에겐 제대로 예술을 접할 길이 열리지 않았다. 여성은 오로지 남성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었다. 마네의 제수로서 후원을 받은 모리조나, 드가의 동료로서 도움을 받은 메리 카삿이 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클린은 이런 여성혐오적인 배경에서 탄생한 리얼리즘을 수용하고, 예술사가로서 여성주의를 밝힌다. 역설적이지만 노클린의 반문은 다분히 리얼리즘의 비판적 사유와 맞닿아있다. 노클린 역시 여성으로서 가부장제 문화에 귀속돼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둘러싼 근본적인 전제를 의심하고 개혁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노클린의 리얼리즘은 따라서 진실된 것을 지향하는 도덕적인 리얼리즘적 참여와, 탄생한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리얼리즘의 붕괴를 동시에 의미한다. 복제기술의 발전이 아우라의 쇠퇴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유희공간의 확장을 함께 가져왔다는 벤야민의 시각을 빌리자면, 노클린이 원용한 리얼리즘은 단순히 재생산되며 아우라를 상실한 것이 아니다. 리얼리즘은 노클린의 상상력으로 역사의 공간에서 맥락에 맞게 번역되며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확장한 것이다. 

 

 지금 현대인은 19세기 리얼리스트보다, 노클린보다 당대의 규율에서 해방됐다고 믿지만, 사실 기존의 규율이 사라진 공백엔 새로운 신념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현대인은 정보를 채굴할 수 있는 각자의 곡괭이-개방된 디지털 사회-를 쥐고 있어, 저마다의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있다 굳게 믿지만 사실 이는 타자의 지식에 기대있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고도로 발달된 알고리즘은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자체적으로 정보를 가공해 제공한다. 구글의 검색엔진이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SNS는 사용자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 적절한-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게 차츰 현대인은 빅데이터에 의해 형성된 필터버블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지금 들이닥치고 있는 정보의 홍수는 현대인의 실존을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리얼리즘은 타성에 젖은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회의하며,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한 바로 그 세계에, 현대인은 리얼리즘적 사유로 저항할 수 있다. 

 

 

참고문헌

린다 노클린, 리얼리즘의 본성, Style and Civilization, penguin Gooks, 1971

김영호, 한국 리얼리즘의 가능성 연구: 신형상 미술에서 제기되는 리얼리티의 양시고하 문제.

에리히 아우어바스, 김우창, 유종호 엮음, 『미메시스』, 김우창, 유종호역, 민음사, 2012

최성만,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 1995.11.9.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지구화 시대의 현장 여성주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7.11.28.

양효실, 예술의 자율성과 여성주의 –1970년대 여성주의 비평 및 예술을 중심으로, 계간 문학동네 2017년 겨울 통권 93권

김선지, 보수적인 유명 미술관... 여성의 자리 쟁취한 페미니스트들, 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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