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더릭 센더스, <메데이아>를 보고
샌디스의 <메데이아>는 한눈에 알 수 있듯이 마치 집시 여인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마치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나오는 에스메랄다를 연상시키는 곱슬머리, 펄럭이는 옷, 굵은 악세서리는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저항과 해방의 정신을 노래한 집시들이 복수를 다짐하는 메데이아를 잘 대변해주기 때문에 집시 여인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신화에서 나타나듯 메데이아는 그리스인 입장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를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샌디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가들이 그리는 메데이아는 항상 붉은 색을 지닌다. 그녀의 타오르는 정열을 상징하는데 붉은색이 가지는 원형적 의미가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메데이아가 쥐어뜯는 붉은 목걸이가 일렁거리며 그녀 자신까지 옥죄는 파멸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식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꺼비의 교미다.
이 그림의 주제는 결국 ‘사랑’이다. 마녀 메데이아가 저주의 주술을 거는 이유 역시 사랑에서 비롯한다.
에로스적인 색욕이 사랑이라고 풀이될 때, 두꺼비가 그녀의 앞에서 짝짓기를 하는 것은 사랑의 파괴적이고 강렬한 힘을 보여준다.
마치 <황조가>에 나오는 유리왕처럼 자기 짝을 잃은 메데이아 앞에서 노니는 암수 한 쌍은 그녀의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메데이아를 소재로 한 미술작품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샌디스의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아손의 새 여인 글라우케를 죽이고자 독약을 만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화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대로 메데이아는 짐짓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글라우케의 예복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그 예복에 섬뜩한 복수의 칼날을 숨긴 채로.
평론가들은 대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메데이아의 눈빛이 저주, 분노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지독한 사랑의 배신을 맛봤던 자라면 그녀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다른 누구가 아닌 메데이아 자기 자신을 향한다.
메데이아는 혈육의 사지를 찢어 죽일 수 있을 만큼 목표에 맹목적인 여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기대어 산다. 사람을 이루는 중추는 살점과 영혼, 호르몬 작용 따위가 아니라 신념이다. 그 믿음이 원동력이 되어 사람들의 선택을 만들고 그것이 행동이 된다. 메데이아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아손의 권력욕(이아손의 믿음) 때문에 그녀의 사랑은 허물어진다. 사랑은 쌍방의 감정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축을 잃은 감정은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외 사랑만을 남겨둘 수도 있었겠지만 메데이아는 차라리 다른 신념을 선택한다. 바로 ‘복수’다.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갈아치우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완전히 달라지는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필시 두려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복수를 결심하는 메데이아의 눈에서는 공포가 읽힌다. 스스로를 옥죄이던 사랑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녀는 목걸이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이아손을 도와 황금양털을 가져온 과거가 뒤에 그려진 것은 메데이아의 과거가 망령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벌어진 입에서는 허망함이 나온다.
혹자는 사랑에 눈이 먼 메데이아가 멍청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것 또한 필요하다.
과연 메데이아와 같이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던 것이 잘못 되었는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사랑은 보통 비극의 씨앗이 된다. <일리아스> 1권에서 나오는 아가멤논도 브리세이스에 대한 사랑, 정확히 말하면 육욕 때문에 위대한 장수 아킬레우스를 놓쳐 전쟁의 명운을 달리 할 뻔했다. 애초에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것도 파리스가 사랑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진 인간들은 대의를 바라보지 못하고 주변인들까지 파멸로 이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잘못인가?
인간은 모두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원인을 제공한 것은 파리스라고 하나, 결국 군대를 이끈 것은 아가멤논의 야욕이었다. 인간은 그 수단을 달리 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모두 행복을 원한다. 현대인들에게 헤리페리데스의 황금사과가 주어진다면 헤라나 아테네의 손을 들어줄 것 이다. 하지만 그런 권력, 물질적인 욕망만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지적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만성적인 공허는 누가 정했는지 모를 행복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춰 생겨난 것이 아닌가.
이아손은 결국 야망에 눈이 멀어 처자식을 등지고 새로운 여인을 선택한다.
사랑보다 권력이 더 큰 가치라서, 이아손은 야망있는 남성으로, 메데이아는 사랑에 눈 먼 어리석은 여인으로 그려지는 것인가?
그 두 가치의 위계는 누가 설정했나. 그 위계의 정당성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이아손과 메데이아 모두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허나, 메데이아만 악인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이아손의 위선에 속는 것에 불과하다.
샌디스 <메데이아>의 꾸밈새는 공주출신치고 단조롭다. 흰 색의 옷은 마치 수의처럼 정갈하고 소박하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빛을 뿜는 이유는 그녀가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녀 자신자체가 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배신자를 잔혹하게 단죄하는 모습은 메데이아가 ‘그녀 자신’대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오래된 이야기에서 자신대로 살아가는 여성은 많지 않다. 메데이아는 불멸의 상징으로 여러 예술작품에서 부활하고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주체성에 매료됐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선택대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인간의 실존을 빛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다보면 인간이 한없이 초라하고 가여워진다. 신들이 심어놓은 불화의 틈바귀 속에 영원히 고통 받는 인간.
메데이아도 마찬가지다.
헤라의 계략으로 에로스의 화살에 맞아 사랑하게 된 이아손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적을 모두 포기하고 그에게 헌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아손에 의해 다시 모든 것을 잃는다.
이처럼 모든 악행이 신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변명은 신화를 통해 인간의 잘못을 신들에게 돌리려는 운명론적인 사고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그 운명의 틈새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에 모든 책임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끔찍한 패륜과 살인까지 저지른다.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한 개인이 발화하는 주체가 되며 내뿜는 열기는 독자를 매료시킨다.
정말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그녀가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오레스테스의 사례에서도 이미 본 적 있듯이, 에리니에스에게서 광적인 비난을 받는 보통의 인간은 절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신들의 한바탕 놀음이라면, 인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는 것이 후회를 더는 선택이 될 것이다.
메데이아는 바로 그 선택을 해냈다.
한번 결단한 바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은 오히려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메데이아는 그녀 나름의 족적을 남긴 셈이다.
잊힐 바에야 기억되는 삶을 선택한 메데이아가 나름의 행복을 쟁취했다는 이야기는 무의미하게 보내는 인생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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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 미쳤나봐 세상에 이거 2학년 때 쓴 글인데 와 진짜 개 못썼음
이거 처음에 끌고 올 때 이거 왜 그때 점수 개 낮게 받았지? 했는데 세상에 마상에
F 안 준게 용할 정도;;;;; 놀랍게도 교수님 최종 학점은 에이쁠 주셨음;;;;;;; 와 진짜 갓 개꿀강 이었다 ;;;;
이건 그나마 빨리 수정한 거고 원본 세상에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연결 개 쓰레기였다 ㄷ ㄷ ㄷ
그나마 아이디어는 괜찮아 보여서 올립니다.
근데 여러분 이건 신화니까 상징하는 바를 해석하는 게 중요한 거지 실제 사건 액면가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안 돼요.
메데이아는 존속 살인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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