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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가

왜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가 <1>

심리분석

 

자살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가장 증오하는 이에 대한 복수로 자신의 목숨을 인질삼기도 한다. '내가 죽어 저 치들의 악행을 고발하겠다' 이정도의 사고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선택에 대한 유용도를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나'에게 유용한 선택인가. 기독교를 믿고, 내세를 믿는다고 가정하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당신은 예정보다 빨리 죽음을 맞이하게된다. 그것이 과연 유용한 선택인가? 우리 인간은 모두 필멸자의 본질로 태어나 언젠간 죽게된다. 내세가 신의 영역으로 영원하다면, 우리는 그 영원성 속에서 (바르게 산다는 전제 하에) 언젠가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시간 개념이 존재하는 현세에서 예정보다 빨리 온다고 더 좋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내세에서 언젠가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그건 그때가서 즐기면 될 문제고 절대 여기서 빨리 가겠다고 아멘하고 갈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사실 애초에 기독교는 자살하면 천국 못 간다는 걸 내걸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내세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현세의 도래할 행복을 저버린채 갈 필요가 전혀 없다. 언젠가 그것은 찾아오게 돼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세에서 행복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이 경제적으로 올바른 선택이기에. 내세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경제적 합리성의 정도는 더더욱 심화된다. 당신들은 절대 지금 죽어선 안 된다. 현세에서 취할 수 있는 행복이란 행복은 다 취하고 떠나야 한다. 그리고 당신 앞에 놓여있는 그 선택지는 행복의 총량을 높이는데 굉장히 부적합하다. 당신 지금까지 충분히 괴로웠는데, 지켜볼 수 없는, 확실하지 않은 확률의 영역에 놓인 저 복수라는 미지의 쾌감을 위해 실현 가능성이 보다 높은 개선에의 방향을 포기할 것인가. 절대 안 된다. 

 

이제 두번째, 저 치들의 악행이 고발돼 당신의 복수가 완성될 것인가. 

절대 아니다.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음. 

단호하게 아니라니까 되게 당황스러울텐데, 사실이 그렇다. 당신의 죽음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복수는 이 세상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악덕이 살아숨쉬고 있다. 당신의 죽음이, 그 공고한 악덕의 성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다. 보다 강한 것은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불태워 악덕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다. 당신이 죽은 뒤에, 매스컴에서 한동안은 당신에대해 떠들어줄 수 있다. 당신의 죽음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당신을 신나게 소비할 것이다. 이건 매스컴이 자살을 다루는 태도가 개 천박하기 때문인데, 사실 매스컴은 당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는 사또가 아니다. 사연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팔아재끼는 장사치에 가깝다. 당신은 그들의 조회수 수익을 올려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그게 누구든. 그게 왕이었든, 대통령이었든, 빛나는 스타였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기억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어떻게든 상처의 기억으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해주었을 그 누군가에게 상처만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당신을 괴롭힌 이에겐? 아싸가오리지. 그런 놈들이 당신이 죽었다고 슬퍼하고 반성할 것 같은가. 진짜 곰곰이 생각해보라. 반성할 놈 같으면 진짜 부탁인데 한번만 대면해봐라. 대면하고, 사과를 요구하자. 내가 너로인해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다고. 절절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반성할 놈이면 그때 미안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진짜 죽어도 욕먹는게 '조금' 짜증스럽고 사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있어서, 그는 또 어떻게든 행복할 방법을 찾아서,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게 더 억울하지 않나? 난 그게 더 억울하더라고. 그 새끼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누군가와 짝을 이루고, 친구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을 꼬라지만 생각하면 화딱지가 나. 근데 내가 죽으면 그것도 모른 채로 어딘가에 눈 감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것도 강제적으로. 그러니 제발, 그가 당신의 죽음에 용서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지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당신은 무조건, 정말 무조건 살아서 행복의 총량을 채워라.

이 전략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복수다. 

확인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단 자살보다는 훨씬 낫다. 비트겐슈타인 비문학 지문 생각나는 사람들 있죠. 우리는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것만 학문으로 취급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실재에 존재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지향하는 것은 맹인의 호기에 가깝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바에 대한 결과를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죽으면 볼 수 없다. 행복해져서 웃는 낯짝으로 그들의 애처로운 떨림을 지켜보라. 그리고 편해진 당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나요? 저는 절대 걔네보다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는 다음 시간에 다룹니다.